Page 247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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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종의 수행과 신심의 상관성 고찰 • 247




                    여 티끌이 없고 그대로가 깨침의 드러남이다. 본래부터 깨침에 닿
                    아 있는 것으로서 새로이 오늘에야 나타난 것은 아니다. 깨침은 광

                    대겁 이전부터 있어서 확연하여 어둡지 않고 신령스레 우뚝 드러나
                    있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부득불 수행을 말미암지 않으면 안 된
                    다. 32)


                 여기에서 묵조가 단순한 묵과 조가 아니라 묵묵히 앉아 마음은 텅 비

               고, 묘하게 전하여 도가 존귀하게 되고, 깊이 침묵하여 밝게 드러나고,

               고요히 있어 묘한 존재로 나타난다는 의미의 묵과 조이다. 그래서 묵은
               본증의 체로서의 묵이어야 하고 조는 본증의 용으로서의 조이어야 한다.

               이러한 묵조가 전제된 좌선은 바로 是非를 떠나고 離微를 체득한다. 그
               묵조는 곧 妙用으로 나타나지만 有가 아니고 空으로 숨어 있지만 無가

               아닌 원리이다. 굉지는 이러한 現成公案의 의미를 간혹 見成公案으로 표

               현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공안의 현현이라는 범위를 나타내는 말이다.
                 그래서 묵조선에서는 마음의 수행 못지않게 몸의 수행이 강조되고 있

               기 때문에 定慧觀에 있어서도 정과 혜가 동시로 나타나고 있다. 곧 앉아
               있는 그 자체를 깨침의 완성으로 보기 때문에 정이 혜의 형식이 아니라

                                                                        33)
               혜의 내용이고 혜는 정의 내용이 아니라 정의 묘용이라 할 수 있다.  그



               32)  『宏智禪師廣錄』 (T48, 74b) “默默自在 如如離緣 豁明無塵 直下透脫 元來到箇處 不是今日
                  新有底 從舊家廣大劫前 歷歷不昏 靈靈獨輝 雖默恁麽 不得不爲”
               33)  이 점에서 정과 혜는 다르지 않다. 곧 정은 수행의 측면으로 제시된 개념이라면 혜는 깨
                  침의 측면으로 제시된 개념이다. 나아가서 정은 혜가 바탕이 된 수행이라야만 본래의 정
                  이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정은 오후수행으로서의 정이다. 그리고 혜는 정이 완성된 상태
                  의 혜라야만 본래의 혜가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혜는 즉금에 실천되고 있는 지혜로서 교
                  화행위이다. 따라서 정은 지혜의 작용이고 혜는 정의 실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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