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63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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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개교50년지(朝鮮開敎五十年誌)』 번역 • 263




               본산에 청원서를 상신을 하거나, 또는 그 지역 대표자인 총대들이 직접

               나서서 본산에 요청하기 위해 교토로 상경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경성별원을 공사하기 위해서는 “건축 비용은 전체 예산

               4,000원을 훨씬 넘어서 [이를] 준비하지 못한바, 착수 상황에 이르러 재

               류민 독지기부금은 마침내 1,500원을 출자하였사옵니다. 이리하여 본
               산 3,000원의 하부가 없을 때는 도저히 계획한 것이 어렵나이다. 열렬

               히 본산의 재정을 공찰(公察) 하건대, 양당의 재건은 아직 준공하지 못하

               고, 그 외 지출이 많은 만큼 즉시 3,000엔을 하부하는 건은 출원하지
               않을 수 없사옵니다.” 의 사정이었다. 그때 한국 황실이 금 3,000원을

               건축비용으로 하사하기도 하였지만 또 부지에 문제가 생겨 공사가 계속
               지연되기도 하였다. 재미있게도 이때 한국 황실에서 받은 하사금 3,000

               원은 교토 본산이 가져가는 아이러니한 일도 벌어진다. 그 이후에는 본

               산의 사정이 좋지 않아 보조금 850원도 원활히 받을 수 없었을 뿐만 아
               니라, 러일전쟁이라는 고통스러운 상황에 또다시 직면하기도 하였다. 이

               러한 우여곡절 끝에 경성별원은 1906년 11월 드디어 낙성식을 하게 된
               다. 이 낙성식에는 일본의 대표적 불교학자인 이노우에 엔료(井上圓了)와

               난죠 분유(南條文雄)가 축하하기 위해 참석하기도 하였다. 이 별원을 건립

               하기 위해서는 재정적인 측면도 아주 중요하였지만, 조선인과의 갈등도
               크게 자리하였다. 목포에 별원을 건립하기 위해 건너간 奧村圓心은 조선

               인의 반대에 결국은 헛고생만 하고 광주로 올 수밖에 없었던 때도 있었

               고, 圓心의 여동생인 오쿠무라 이오코(奧村五百子)가 광주에 실업학교를
               운영하고자 하였을 때도 결국은 조선인과의 마찰로 제대로 운영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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