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85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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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개교50년지(朝鮮開敎五十年誌)』 번역 • 285
몸을 숨기고 발전의 기운을 잃은 잔해(殘骸)를 안고 산금야수(山禽野獸)
를 벗으로 풍운이 오기를 기다려만 했다. 그 후 승려가 되려는 자는 많
은 죄를 지은 자, 사생아, 첩복(妾腹)의 자손 등 사회 불구자의 조건을 갖
춘 자로, 몇 개의 사원은 불등(佛燈)이 희미해져 어두워져 가고, 새로 수
축(修築)할 기량도 없이 다만 자연스럽게 퇴폐한 호리(狐狸)의 소굴이 되
어 갔다.
이리하여 조선왕조 500년 동안 불교 탄압의 결과는 물론 능력이 있
는 자가 승려가 되는 일은 없고, 우연히 승려가 되고자 하는 자는 앞에
언급한 바와 같이 사회의 불구자로 겨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도식(徒
食)하는 자일뿐이어서 자연히 학문에 매진하여 스스로 회생할 기력도
빼앗겨 버렸다. 단지 길흉화복(吉凶禍福)이 기복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생
각하는 어리석은 남녀(愚夫愚婦)가 불교라 이름하여 명맥을 유지하는 것
에 지나지 않았다. 이른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조선시대에는 진정한
불교는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0년 전 일찍이 집권을 잡은 대원군은 그 권세로 경복궁을 완성함에
정권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수백 명의 승려를 초대하여 제연(齊筵)을
펼쳤다. 5백 년 오랜 세월 동안 이런 일은 생각할 수 없었던 승려는 마치
조선 집권자의 지우(智愚)로 부활의 기회를 참으로 얻는 순간이었다. 하
지만, 대원군 집권 정치는 모름지기 조선 전역에 걸쳐 내우외환(內憂外患)
이 반복되면서 다시금 불교를 뒤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끝내 승려는 주
목받지 못하였고, 주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