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3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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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개교50년지(朝鮮開敎五十年誌)』 번역 • 293




               를 올린 淨信은, 다시 건너가 포교 전도의 뜻을 이루기 위해 어진영을

               하부 받아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종군 장졸(將卒)이 조선
               을 철수하였기에 1598년 여름쯤 도항은 했건만, 전란의 영향도 남아 있

               고 재흥(再興)의 방도도 없고 하여 12월에 포기하고 귀국한 것이 아닐

               까? 라고 추측한다.



               고덕사 사지(寺趾)에 대해 (16쪽)



                 다음으로 부산 고덕사 즉, 淨信이 조선에 창건한 사원의 사지(寺趾)                    48)

               에 관한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현재 정확하지는 않다. [현재는] 동래 범어
               사 부근 내지는 혹은 초량으로 추측한다. 또 일설에는 처음 대포(大浦)에

               있었던 것을 후에 초량으로 이전하였다고도 한다. 여러 설이 있지만 초

               량이 가장 유력한 것 같다. 그러나 유감스러운 일은 사찰의 터라 할만한
               것이 아무것도 현재 남아 있지 않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은 외교 무역 등 대부분 宗對島守를 통해 이루어진 시기로,
               교토 오산(五山) 승려가 외교 무선 및 번역 등을 번역 등을 관장하기 위

               해 입항하여 울산, 부산, 웅천 등지의 지방에 체재였지만, 포교를 목적

               으로 도항한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淨信의 도항은 일본불교도로서 조
               선 개교의 시초임과 동시에 정확하게 말하자면 본원사의 첫 번째 개교

               였다.






               48) 절터를 의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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