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98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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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8 • 『퇴옹학보』 제18집




            년간 성쇠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1872년 8월 처음으로 외무관사

            가 파견되어 초량관에 주재하였고, 7년 관리관으로서 모리야마 시게루
            (森山茂)氏가 주재한 뒤 점차 거류지의 체재를 정비하게 되었지만, 전관거

            류지(專管居留地)로서 계약을 체결한 것은 1881년 1월의 일이다.

               당시는 부산항을 동래 서관으로 분리하고, 용두산의 중턱에서 동쪽
            을 동관, 서쪽을 서관이라 하여 일본인 대부분은 이 동관에 살고 있었

            다. 겨우 30여 가구에 인구 300에 못 미쳤다. 서관 쪽은 현재 별원에서

            서의 서태청, 중태청, 동태청으로, 관사형태의 건물만 있어, 갈대와 물
            억새가 무성한 늙은 여우나 오리의 거처나 다름없었다. 소위 관리관의

            청사는 조선가옥으로 아래 방향에는 다이슈번(對州蕃) 출장소에 해당하
            는 건물이 있고 거기에 경관 등이 거주하였다. 당시 관리청이라고 해도

            역원은 순사도 포함하여 10명도 채 되지 않았고 그 이외 관사도 군인도

            재류하지 않았다. 더구나 당시 부산은 유일한 일본과의 무역항이었기
                                          53)
            때문에 조선의 오곡류와 당목(金巾) , 기름, 그 외 잡화와 물물교환하면
            서 매우 빈번한 왕래가 있었다고 한다.



               별원 창설 (22쪽)



               오쿠무라 엔신, 히라노 케이스이(平野惠粹)의 두 승려가 부산 출장을

            명받은 것은 1877년 8월의 일이다. 당시 일본과 조선의 교통은 매우 불






            53) 광폭, 너비가 보통 것보다 2배 되는 옷감의 한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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