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02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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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 • 『퇴옹학보』 제18집




               당시 포교 상황 (26쪽)



                                         57)
               포교는 본디 이제상의(二諦相依)  종의(宗義)에 근거하여 안으로는 자
            각(自覺)을 강조하고 밖으로는 생활의 정화를 촉구하는 것은 두말할 필

            요도 없다.
               1877년 10월 처음 보수공사를 마치고 11월 8일 제1회 법회를 개시

            한 뒤 매월 날을 정해서 4회~5회의 정례를 개최하였다. 한편 奧村師를

            비롯한 조선에 체재하여 근무한 모든 사람은, 단순히 독경과 법화에 그
            치지 않고 항상 재류민의 스승으로서 일상다반사에 있어서도 교가(敎家)

            로서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을 잊지 않을 정도로 긴장감을 가지고 있었
            다 한다. 1879년 7월에는 현재 부산부인회의 모체인 여인강(女人講)이

            조직되어 부녀자의 각종 시설이 강구되었다. 1879년 1월 7일은 입불공

            양(入佛供養) 대법회가 열리어 부산의 재류자는 물론이거니와 경성에 있
            는 하나부사(花房) 公使까지 참배를 하고, 부산 개벽(開闢)이래 가장 성황

            을 이루었다. 어찌 되었든 유일한 사원으로서 일반인들의 환영을 받고, 또
            한 타지에 있는 동포의 마음을 어느 정도 위로한 것은 상상하고도 남지

            않겠는가.

               그러나 개교의 목적은 일본거류민을 위한 것으로 교법을 전달하는
            것 이외 더욱 중대한 사명이 있었다. 즉, 조선인에 대한 포교이다. 따라

            서 奧村師는 그들과의 접촉을 위해 크게 고심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57)  정토진종에서는 불법을 진제(眞諦), 왕법을 속제(俗諦)라 하여 서로 상의(相依), 즉 서로
               의지하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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