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14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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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 • 『퇴옹학보』 제18집




               1882년 6월 인천개항이 확정되어 갈 무렵, 포교장 설치 청원을 위해

            奧村圓心師는 도쿄로 향하였다. 때마침 前田총영사가 도쿄 체재 중으
            로, 영사는 본원사가 조선 개교 이래 양국 국제간에 큰 공로가 있음을

            회상하며 岩倉공에게 상서를 올려 개교 이래의 사적(事跡)을 알리고자

            하였다. 또한, 조선포교에 더욱 진력을 기울여야 할 시점인 까닭에 칙명
            을 내려주면 문말(門末) 대동하여 분기(奮起)할 것을 역설했다. 岩倉공은

            그 뜻을 헤아렸지만, 井上외무경은 꺼리는 바가 있어 좀처럼 받아들여
                                                                  64)
            지지 않자, 이에 영사는 성을 벌컥 내고 분노하면서 각 성경(省卿)  및 차
            관에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여 양해를 구하였다. 岩倉공도 본원사 법

            주대하의 뜻을 묻는 등, 칙명 문제는 상당히 시끄러웠다. 영사의 주장이
            실현되었을 그 무렵 경성공사관 사변(임오군란)이 촉발하여 영사 등은 사

            무에 분주하여, 奧村師는 종군을 명받아 결국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하

            지만 이 일대의 사건은 당시 당국을 비롯하여 정부 관계자가 얼마나 혼
            간지 개교에 기대하고 여기에 원조를 아끼지 않았는지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인천은 개항 얼마 되지 않아 임오군란에 휩싸이고 거류지 경영에도

            상당한 지장을 초래하여 사람들에게(人心) 불안을 주었지만, 1884년 또

            갑오군란이 경성에서 일어나서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와 함
            께 겨우 몸만 피하여 경성을 탈출하여 인천으로 난을 피하였다. 그 여

            파를 받은 인천의 민심은 실로 흉흉한 상태였다. 더구나 경성에 이 난으




            64)  일본 율령관제 8성(省), 8성(中務·式部·治部·民部·兵部·刑部·大藏·宮內)은 일본의 관직체계
               를 이루는 핵심 중앙부서로, 장관을 경(卿)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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