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15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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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개교50년지(朝鮮開敎五十年誌)』 번역 • 315
로 사망한 동포의 사체는 전부 인천으로 인도되어 지금의 미야마치도
오리(宮町通)에 수용되었다. 하지만 당시 겨우 개항한지 3년, 100여 가구,
인구 500도 되지 않는 거류민에게는 이들 순난자(殉難者)의 넋을 위로할
장례를 주관할 승려도 없고 유해는 허무하게도 낯선 땅 비바람을 맞아
매우 비참한 상황으로, 그들에 대한 애통한 마음이 어찌할 바를 몰랐
다. 한편, 일본 거류자의 수도 점차 증가하여 자녀 교육이 절실했지만, 결
국 학교 건설은 불가능한 상태여서 이와 함께 당시 부산별원 윤번이었던
太田祏慶師가 본원사 포교소를 설립하였다. 인천의 개교는 太田祏慶
師가 奧村師의 뜻을 이어받아 노력한 것으로 太田師의 힘입은 바가 컸다.
포교소 설치 (40쪽)
이리하여 田中良助, 向山伊太郞, 福島友吉 등은 당시 총대표 역장(總代
役場)과 결의하여 영사 고바야시 단이치(小林瑞一)를 비롯하여 松本淸五郞,
堀久太郞, 釘宮喜十郞, 今世久七, 富田重五郞, 濱田辰五郞의 찬동을 얻어
太田師의 손을 거쳐 개교사 파견을 본원사에 간청하였다. 본원사에서도
이미 기획을 하고 있어서 즉시 이를 승낙하였다. 그리하여 太田師는 부
산에서 근무하면서 朝倉多賀磨師를 보내어 [이곳을] 부산별원 인천지원이
라 하였는데, 이것이 인천 개교의 첫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때가 1885년
9월이다.
인천 개교는 거류민의 간청에 따라 특히 자녀의 교육을 본원사에 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