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16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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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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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하였기 때문에 朝倉師는 곧바로 데라코야식(寺小屋) 의 수업을 개시
하였다. 그러나, 세대 수가 적어 개교사 한 사람의 생활 감당이 곤란했
66)
기에 朝倉는 집집마다 일주일씩 기식(寄食) 하면서 포교활동에 종사하
였다. 후에 후쿠시마구미(福島組)에 임시 기거하였고, 그 후 다타미 3개
정도의 집을 얻어 비로소 본존을 봉안하고 형식적이지만 포교소를 설
치 할 수 있었다.
1888년에 이르러 당시 조선에서 근무하던 이시카와 카오루(石川馨)
師는 앞서 언급한 유지의 발기에 따라 중정(仲町)에 101평을 상지(相地) 67)
하였는데, 거류민의 기부와 본산의 보조 및 경성, 원산 등의 신도 기부
금을 얻어 임시 본당을 건립하였다. 즉, 인천별원 근간은 여기에서 시작
되게 된다.
당시 포교상황 (41쪽)
1887년 5월 11일 부산별원 윤번 太田茄慶師가 돌아가 조선교계의
현황을 본산에 보고하니 인천의 상황은,
인천항 포교는 이제 시작으로 여전히 미진하여 충분한 결과를 보
지 못했는데 작년 겨울 이후 점차 그 성과를 보게 되었다. 올해 1월
65) 일본 근세 미성년자 대상의 민중교육기관, 교육 내용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일본어 읽기,
쓰기, 실용적인 지식과 재능을 필요로 하는 주산 등을 배웠다.
66) 남의 집에서 붙어서 밥을 먹고 지내는 일
67) 풍수지리에서, 땅의 생김새를 보고 길흉을 판단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