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19 - 퇴옹학보 제18집
P. 319
『조선개교50년지(朝鮮開敎五十年誌)』 번역 • 319
70)
년 9월 현관, 복도를 중축하고, 1911년 9월에는 종루(鐘樓) 를 건설하
였다. 1927년의 윤번 長崎阿彌也師는 산문(山門) 및 주위에 문을 축조하
고 돌계단을 보수하였다.
제6장 경성 개교 (44쪽)
개교 당시의 상황
경성에 처음으로 개교의 단초를 연 것은 1890년이다. 경성은 1882
년, 1884년의 변란(變亂)을 거쳐 1885년 개시장(開市場)을 열고, 이어서
일본 일반 상민들도 공공연하게 왕래를 허가받았다. 당시 재류민은 가구
수가 고작 100여호, 관민 합하여 300명 내외, 겨우 일본 마을의 형태만
갖춘 시기였다. 따라서 어떠한 종교도 개교를 개시하려는 자는 없었다.
하지만, 거류민 간에는 사원 건축의 희망을 품은 자도 적지 않았다.
1889년 8월부터 야마구치 타헤에(山口太兵衛)氏는 재류민 자제 학습
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스스로 주창하여 아동교육을 시작하였지만, 적
당한 교사를 구하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당시 인천에는
이미 포교소가 있었기에 山口氏는 경성에도 포교소를 설치하여 근무자
가 포교와 동시에 교육상의 책임을 지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였다.
때마침 인천지원의 신도 向山茂平氏가 경성에 지점을 열고 이러한 상
70) 종을 달아두는 누각(鐘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