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18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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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 • 『퇴옹학보』 제18집
인천포교소 설치는 도내 아동 교육이 하나의 목적이었기 때문에 인
천 근무는 아동교육에 대부분 시간을 할애해야 했었던 것은 두말할 나
위 없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인천교사(仁川敎社), 여인강(女人講) 등을 설
립하여 아주 큰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당우(堂宇) 건축 (43쪽)
포교소에서 근무하는 포교사의 헌신적인 교화로 깊은 신앙심을 얻
은 거류민들은 서둘러서 가람 건축을 요청하였다.
1896년 5월 구체적인 준비 단계에 들어가자 본당 건축 협의회가 열
렸다. 자리에 함께 한 田中良助, 堀力太郞, 上田佐一郞, 關岡幸次郞, 太田
吉太郞, 山崎好藏, 山田貞次郞, 平原喜造, 佐分榮次郞, 廣池亭四郞, 이들
은 본당 건축을 열심히 주장하였고, 그 결과 武田某, 田中良助, 山田貞
次郞 세 사람이 교섭위원이 되었다. 이들은 상경하여 2개월 정도 교토
에 체재하면서 거듭 본산과 접촉한 결과, 본산 허락을 얻어 7간 4면의
목당 건축과 2,500원을 하부(下附)받았다. 인천 거류민의 기부금 만몇
천 원을 얻어 바로 현재 이 지역 3,000평을 골라 1899년 10월 본당 및
69)
고리(庫裡) 를 기공하여 1900년 11월 준공하였다.
이로써 앞의 1899년 2월 경성별원 인천지원을 개칭하여 인천별원으
로 하고 근무자인 三浦六雄師는 최초 윤번으로 임명받았다. 이어 1901
69) 사찰에서 붓다에게 올리는 공양이나 스님들의 음식을 마련하는 장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