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20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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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 • 『퇴옹학보』 제18집




            황을 살피고 있었다. 山口太兵衛, 中村再造, 和田常一, 穗積甲斐 등은 인

            천지원과 교섭하여 1890년 7월 포교소를 설치하게 되었다. 山口太兵衛
            氏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당시 인천에는 일본인이 1,000여 명이 있었고 본원사 포교출장소
                 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경성 포교에 책임지고 최선을 다할 것을 명

                 받았다. 포교출장소 설치 경비를 받는 등의 조건으로 본원사 赤松
                 慶惠師를 경성으로 보내고, 須田씨(소학교 교사)의 후임을 겸해주기
                                       71)
                 로 하였다. 그런데 불간(佛間) 이나 포교사의 주택도 필요로 했기
                 에 거류민청 뒤쪽의 한 동을 4원으로 얻어, 그 집의 큰 방을 교실로
                 써, 한쪽을 불간으로, 한쪽은 주거공간으로 삼았다. (日出第9號, 日出
                 學校 そもそものお話)



               즉, 지금의 수정(정문루:壽町-井門樓)에 제1차로 본원사 포교소가 부산
            별원, 경성지원으로세워지고 赤松慶惠師가 재근(在勤)하면서 부임했던

            것이다. 山口太兵衛, 和田常 一, 森勝次, 藤井友吉, 淵上休兵 등, 이들이
            경성지원 경영을 대표하였다. 그런데 건물이 협소하여 1891년 3월 동북

            약 1정(丁) 주동(鑄洞) 37호에 540여 평의 토지를 택하여, 온돌을 매수하

            여 이전하고 학교도 함께 이전하였다. 이리하여 赤松師는 사임퇴직하고
            今永圓純師가 후임으로서 부임하였다. 후에 今永師는 불행하게도 사임

                                                                  72)
            을 하는 상황에 이르렀지만, 그는 경성영사관 감옥교회(監獄敎誨)  및 수



            71) 불상이나 위패를 모신 방.
            72)  감옥 수용자를 대상으로 종교인이 교화시키는 행위. 일본에서 감옥제도가 생긴 것은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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