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21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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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개교50년지(朝鮮開敎五十年誌)』 번역 • 321




               비군 포교의 창시자였다. 이른바, 조선의 감옥교회는 여기에서 시작된

               것이다.



                 별원 설치와 부지 매입 (46쪽)



                 경성지원은 얼마 되지 않아 조선 가옥에 회상(繪像)을 봉안하고 그 일

               부를 할애하여 학교로 하였는데, 이 지원은 처음부터 장대하고 화려한

               모습을 갖추지는 못했다. 하지만, 당시 거류지에서는 누구도 이를 괴이
               하게 생각하지 않고 거류지 유일 종교 및 교육기관으로서 대단한 존경

               의 대상이었다. 이리하여 1894에 이르러(1891년에서 1897년경까지의 사정은

               불명확하다. 하지만 당시의 고로(古老)의 말에 따르면 거류지치고는 지나치게 개척되지
               않았던 때라 대부분 기관도 없고, 지원으로서도 종교상의 업무도 재류민 자제교육 외

               에 특별할 만한 것은 없었던 것 같다.) 거류지 내외의 정세는 지원을 그대로 둘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여기에 당시 부산별원 윤번이었던 松見善月

               師는 5월 경성으로 부임하여 경성지원의 신축과 본존의 하부(下附)를 본
               산과 교섭하게 된다.




                    당시 경성지원은 지난 1890년 개교 당시 임시 부지 500평과 한인

                    가옥을 매입하여 300대(代) 어본존을 안치하고 경성 개교장으로
                    정하는 바, 앞으로 일본 거류민이 해마다 증가하고 곧 200호 800


                  치 10년대 후반의 일로 그 후 명치 20년대를 통해 정토진종이 ‘감옥교회’ 사업을 거의 독
                  점하여 실시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감옥교해는 진종교단에 의해 창시되었다는 것이 지금
                  까지 통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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