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28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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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8 • 『퇴옹학보』 제18집




               한편, 이 상신서에서도 조선왕조 하사금을 본산으로 상납해도 좋다

            는 것을 인정하고는 있지만, 7월 1일 마침내 이 하사금을 본산으로 [실
            제] 상납하게 되자 총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7월 5일 하사금은 본산

            으로 보내졌다. 경성에 필요한 돈을 무엇 때문에 본산으로 상납한다고

            했는지 또 본산이 무슨 필요가 있어 돈을 상납시켰는지 필자는 그 이유
            를 알 수 없으나 꽤 흥미로운 일이다.

               10월 12일 福田師는 사임하고 橘智了師가 후임 윤번으로 착임하였다.

               이러한 불안 속에서 1900년을 맞이하였고 경성별원 건축은 점점 불
            투명해져 평판은 나빠져만 갔다. 또한, [본산 상납] 하사금에 대해서도 실

            로 면목도 없고 하여 마침내 고리(庫裡)를 먼저 건축하여 일시적으로 비
            난에 대처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먼저 부지를 개착(開鑿)하고 땅 고

            르기를 松川長二郞라는 사람이 인수하여 4월 25일 고리 건축 입찰을 진

            행하였는데, 4,367원으로 平原喜造라는 사람이 낙찰을 받아 드디어 건
            축에 들어갔다. 이리하여 11월 9일 드디어 낙성, 이를 임시 본당으로 이

            전 천불식(遷佛式)을 거행하고 개교 후 10년 드디어 학수고대하던 일본
            식 건축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고리로 90평 건평의 단층집

            이다. 이에 한국 황실 민비로부터 1,000원, 영친왕으로부터 500원을

            추가로 건축비로 하사받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당우 건축이 진척되지
            않아 비난의 공격을 견디지 못해 橘師는 12월 사직하였다. 그로부터

            1902년 6월 大中臣信교사 착임까지 후임 없이 靑山智道는 재근(在勤)하

            면서 사무일을 담당하였다. 大中臣師도 또한 한인교회를 설립, 영등포
            에 출장소를 설치하였는데 마침내 11월 사직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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