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33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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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개교50년지(朝鮮開敎五十年誌)』 번역 • 333
력으로 2월 중순까지 약 20,000원이 모였다. 이리하여 井波師는 신도
총대 森勝次氏와 함께 설계 및 공사입찰 등을 위해 상경하였다. 교토에
서 약 50일을 보내면서 설계하고 그 외는 본산 공작장(工作場) 기사에 의
뢰하였다. 공사입찰 결과, 교토 尾瀧菊太郞씨가 낙찰받았다.
처음 7간 4면의 예정을 13간 4면으로 변경하는 것에 대해 본산에 교
섭하였지만, 좀처럼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에는 만약 부채가 발생
하면 森勝次씨와 윤번이 그 책임을 지고 본산에는 폐를 끼치지 않는다
는 계약을 하고 비로소 본산의 허가를 받아 돌아왔다.
5월 6~7일에 걸쳐 드디어 지축식(地築式)을 거행하고 공사에 착수하
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원조 (60쪽)
조선왕조는 경성별원 당우 건축설계가 전해지자 즉시 금 3,000원을,
고리(庫裡) 안이 건축되자 1,500원을 하사하였다. 또한, 조선왕조는 본
당 건축에 착수하였다는 것을 전해 듣고 세 번째 지원금을 하사하였다.
즉, 금 2,100원을 공사관을 경유하여 1905년 9월에 전달하였던 것이
다. 문신도가 거듭 후의에 기뻐하고 있었는데 그때 큰 문제가 발생하였
다. 건축하는 데 끝지름 1척 5촌 길이 45척의 아주 큰 재목 12개를 필
요로 하는 것으로, 어디에서도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각종 회의를
거친 결과 조선왕조의 관림(官林)에 이 정도의 나무가 있을지도 모른다
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바로 청원서를 넣고 재목을 받고자 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