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337 - 퇴옹학보 제1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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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개교50년지(朝鮮開敎五十年誌)』 번역 • 337
92)
화성대 위에 큰 본당이 가로막아
조선 경성의 백만 집들을 압도한다.
팔도 사람들 그 누가 우러러보지 않겠는가?
찬란하게 핀 보리화가 정원에 가득하네.
93)
병오 11월 서울 본원사 신당 낙성을 축하하며 井上甫水 군의 운자
를 따서 짓다.
南 條 文 雄
왜장대 위에서 보니 막힘이 없는데
서방 옛 부처님의 집을 다 지었네.
우러러 군왕이 내려준 현판을 바라보니
94)
엄연한 여덟 글자가 마치 우담화 같다.
제7장 광주 포교 (64쪽)
개교전기(開敎前記)
1897년 6월 3일의 일이다. 오쿠무라 엔신師는 여동생 오쿠무라 이오
코(奥村五百子)와 함께 상경하여 본산 사무소에 아래와 같이 2개 조를 올
92) 서울시 중구 예장동 일대. 1885년 이후 일본인들의 도성 거주가 허락되자 일본인들은 주
로 남산 주변 지역에 거주했다. 이 지역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들이 머물렀던 곳이라 倭
將臺, 倭城臺, 倭將터 등으로 불려졌다. 일본인들은 ‘倭’자를 싫어해 ‘和’자로 고쳐 和城
臺로 했다. (이 내용은 조병활 원장에 의한 것이다.)
93) 甫水는 井上圓了의 호이다.
94) 이 번역문도 성철사상연구원 조병활 원장의 도움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