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9 - 고경 - 2018년 8월호 Vol.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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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며 모습도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차전이다. [모든 경전과 논소에서 항상
            ‘비非’자로 모든 법을 부정하는 것이 이것인데, 한번 사용했다 하면 30개나 50개의 비非자

            가 이어진다. ‘불不’자나 ‘무無’자도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래서 모든 비非를 끊는다고
            말한다.] 만일 ‘지견의 깨달음이 비춤, 신령스런 거울의 광명, 깨끗하게 밝

                                                                       1)
            고도 밝음, 고요하고도 고요함 등등.’이라고 말하면 이것은 표전이다.”  용
            수는 이런 방법들을 사용해 모든 연기적인 존재는 공이며 무자성임을, 즉
            연기=공=중도=무자성임을 증명한다.

              여기서 또 하나 주의할 점이 있다. 중도中道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그것

            이다. 중도는 중용中庸과 의미가 확연히 다르다. 결론적·대체적으로 말해
            연기적인 모든 존재는 자성이 없다는 공성空性에 기반한 가르침이 중도라
            면, 실체적인 유有에 근거해 전개된 사상이 중용이라 할 수 있다. 토대와

            출발점이 다르다. 이를 겉만 보고 같다고 하면 불교이해에 심각한 오류가

            생긴다.  예를  들어  숫자  2와  8의  중용을  숫자로  표현하면  5가  된다.
            2+8=10, 이 10을 2로 나누면 5이기 때문이다. 이 숫자 5는 상대적인 5일
            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중도는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고 절대적인 개념

            이다. 다시 말해 2와 8을 초월한 절대적인 개념이다. 유有의 상대적인 개

            념은 무無다. 유와 무의 상대적인 영역領域을 초월한, 유에도 집착하지 않
            고 무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비유비무인 중도의 개념이다. “부처가 무엇
            입니까?”라는 물음에 “마삼근麻三斤!”이라고 응대하는 것은, 개념적·논리








            1) “ 六, 遮詮表詮異者, 遮謂遣其所非, 表謂顯其所是. 又遮者揀却諸餘, 表者直示當體. 如諸經所說眞妙理
              性, 每云: ‘不生不滅, 不垢不淨, 無因無果, 無相無爲, 非凡非聖, 非性非相等.’ 皆是遮詮. [諸經論中,
              每以非字非却諸法, 動卽有三十五十箇非字也. 不字無字亦爾, 故云絶百非.] 若云: ‘知見覺, 照靈鑒光
              明, 朗朗昭昭, 惺惺寂寂等.’ 皆是表詮.” 『대정신수대장경』제48권, p.40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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