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58 - 고경 - 2018년 8월호 Vol.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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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강 역시 「성무애악론聲無哀樂論」에서 자연과 명교의 조화를 추구했다.


                “옛날의 왕은 하늘의 가르침을 이어 만물을 다스렸고, 반드시

                간단함과 쉬움의 가르침을 높이 받들었으며, 함이 없는[無爲] 다

                스림을 시행했다. 임금은 위에서 조용히 다스렸고, 신하는 아래
                에서 순응했다. … 마음을 조화시켜 내부를 만족시키고, 기를
                다스려 외부를 살폈다. 그래서 노래로 뜻을 밝혔고, 무용으로

                심정을 널리 드러냈다. 그렇게 한 뒤에 그것을 글로 지어 문장

                을 모았고, 노래와 무용을 밝힘으로서 풍과 야라는 시의 형식을
                만들었다. … 마음이 이치를 이치가 마음을 서로 따르도록 했으
                며, 기氣가 소리에 소리가 기에 상응하도록 했다. … 큰 가르침

                [大道]의 융성함이 이 보다 더 성대한 적이 없었고, 지극한 편안

                                                31)
                함이 이 보다 더 드러난 적이 없었다.”

             이처럼 완적과 혜강의 전기 사상은 자연과 명교의 조화로운 발전에 강

           조점이 있었다. 그러나 249년에 있었던 사마의 중달의 쿠데타 이후 조씨

           와 사마씨 간의 정쟁政爭에서 사마씨가 우위를 점하고, 사마의의 아들 사
                                                         33)
           마소 등 사마씨 집단이 명교를 이용해  “염치도 없이”  사회질서를 어지
                                           32)





           31)  [三國魏]稽康著·戴明揚校注, 『稽康集校注』, 北京:中華書局, 2016, p.357.


           32)  余敦康著, 『魏晉玄學史』, 北京:北京大學出版社, 2004, p.300.

           33)  왕부지가 『독통감론讀通鑑論』권11에서 한 말이다. “서진의 무제가 처음 들어섰을 때 … 당시 임용된
              사람들 즉 가충 임개 풍욱 순심 하증 석포 왕개 석숭 반악 등은 모두 ‘청렴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
              며’[寡廉鮮恥], 이익과 사치를 탐욕처럼 추구한 ‘비열한 인간들’[鄙夫]이다.” 余敦康著, 『魏晉玄學史』, 北
              京:北京大學出版社, 2004, p.300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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