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25 - 고경 - 2018년 9월호 Vol.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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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었을까? 그가 어떤 자세로 경전 번역에 임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이 없
            지는 않다. 남조 양나라 스님 혜교慧皎(495∼554)가 편찬한 『고승전·권2·
            불타야사전』에 자취가 있다.




                “구마라집은 스승 불타야사가 고장(감숙성 무위武威)에 도착했다
                는 것을 알고 후진 왕 요흥에게 그를 장안으로 모실 것을 요청
                했다. 요흥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한 어느 때 요흥이 구마

                라집에게 경장經藏을 번역하라고 말했다. 구마라집이 아뢰었다.

                ‘무릇 붓다의 가르침을 널리 펴려면 마땅히 글의 뜻이 부족함 없
                이 통해야 합니다. 저는 경문을 외울 수는 있지만 이치에 대해
                서는 잘 모릅니다. 오직 불타야사께서 깊고 그윽한 의미를 통달

                했습니다. 그 분이 지금 고장에 계십니다. 그 분이 장안에 올 수

                있도록 조칙을 내려 주십시오. 불타야사가 (경전의) 한 마디 말에
                세 번 생각한 뒤 붓을 들어 써야만 붓다의 미묘한 말이 어그러
                지지 않습니다. 그래야만 (경전을 보는 이들이) 천 년을 지나도 그

                내용을 믿을 것입니다.’ 요흥은 구마라집이 말한 대로 사신을 파

                견해 그를 맞이하게 했다. 많은 예물을 주었으나 불타야사는 하
                나도 받지 않았다. … … 그 때 구마라집은 『십주경』(『화엄경·십
                지품』)을 번역하고 있었다. 의심스럽고 어려운 부분에 걸려 한 달

                여 정도 (번역의 내용을) 결정하지 못해 붓을 들지 못했다. 불타야

                사가 이미 장안에 도착했기에 함께 논의해 뜻을 찾고 문장을 결
                정했다. 비로소 글에 조리가 서고 뜻에 모습이 갖춰졌다. 출가
                자·재가자 3천 여 명이 의미와 글이 가르침의 요지에 딱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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