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0 - 고경 - 2019년 6월호 Vol.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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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상 여기에서 일단 종결하려고 했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
하면 식과 명색과의 관계는 주관 객관의 관계이기 때문에, 주
관이 있는 까닭에 객관이 있고, 객관이 있는 까닭에 주관이 있
어, 양자의 결합에 의해 세간이 있다고 한다면, 인식론상, 일
단 완성되기 때문이다.”(「사실적 세계관」 제5장 3절)
‘식↔명색’, 주관객관의 상의관계에 이르러 세계에 대한 기술은 일단의
완결을 본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기무라에 의하면, 붓다는 그와 같은 고
정적인 세계 이해의 구도에 만족하지 않았다.
“이것은 곧 칸트의 입장이다. 그렇긴 하지만 앞에서 서술해온
것과 같이, 불타의 입장은 어떤 것인가 하면, 쇼펜하우어적으
로, 식의 근저에 무명, 업의 의지가 있다고 하는 것인 까닭에,
정확히 말하면, 결코 인식의 주체로서의 식만으로 일체를 해
결할 수는 없다. 좀 이른 말이지만, 소위 멸관의 쪽으로부터
식이 멸함으로써 명색이 멸한다고 하는 것으로부터, 왜 우리
들은 이 식을 멸할 수 없는가 라고 반문한다면, 이 식의 근저
에는 시작도 없는 번뇌 업이 있기 때문이라고 필연적으로 말하
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사실적 세계관」 제5장 3절)
인용문 가운데 ‘멸관’이란 역관의 것이다. 기무라는 역설한다. 불교가
드러내고자 한 것은 칸트적인 정연한 객관적 세계관이 아니라 쇼펜하우
어적인 맹목적으로 생존을 갈구하는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것
을. 이렇게 하여 ‘식↔명색’의 근원에 행, 나아가 무명이 상정되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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