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2 - 고경 - 2019년 6월호 Vol. 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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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의 가장 중요한 논점은 기무라의 무명론, 그 본질로서의 의지론,
그리고 의지에 의해 움직여지는 생명관에 있다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적어도 논쟁의 전前 단계에서는 다른 쟁점, 예를 들면 연기에
대한 이해나 윤회설에 대한 인정 여부 등에 대한 대립은 그렇게 큰 것이
아니고, 논점의 핵심이 되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대로 기무라는 삼세양중의 연기설을 붓다의 제일의적 주
장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곧 그는 “그 해석은 반드시 불타의 대정신大
精神이 담긴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역시 그 근거하는 바는 있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옛 성전 중에는 연기지의 전부를 거론하여 3세 내지 2세에
배당시켜 설한 것은 없지만, 그 근거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없는 것도 아
니다.”(「사실적 세계관」 제5장 7절) 라고 「맛지마 니까야」의 내용을 인용한 후,
“그렇긴 하지만 이것을 불타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해석은 불타가 취한
극히 통속적通俗的 방면을 취한 것으로, 단정컨대 제일의적인 주장이 아닌
것은 어디까지나 잊어서는 안 된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木村 전게서).
더군다나 연기설과 윤회의 관계를 다루어도 “연기관의 주요한 목적은
후에 크게 주장된 것과 같이 2세1중이라든가 삼세양중인 것과 같이 소위
분단생사의 규정을 분명히 하려고 했다기 보다는 오히려 소위 찰나생멸
의 법칙을 분명히 하려고 한 것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사실적 세계관」 제5장 6절). 생사를 절대화하여 6도를 오고가는 것과 같
은 윤회를 설하는 것에 원시불교의 주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논하고
있다. 그리고 우이도 또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삼세양중의 12인연설은 원시불교의 시기에도 또 근본불교의
시기에도 언급되지 않았던 해석이다. 곧 이 해석은 후세의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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