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3 - 고경 - 2019년 7월호 Vol. 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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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제1설에서) 일조日照가 가져온 삼론의 영향은, 단지 현수賢首의 화엄교
학에 의지한 데가 있어, 현수로 하여금 『십이문론소十二門論疏』를 제작하
게 한 정도에 머물렀다. 구마라집 계통의 삼론교설 이외에 특별히 발휘한
바가 있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을 신삼론이라 칭하는 것은 적당하
지 않다고 하였다. 제2설은 가상嘉祥(길장吉藏)을 가지고 삼론종을 수립한
주체로 보는 입장에서 그 이전을 고삼론이라 칭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
은 학파와 종파라고 하는 정도의 구별이라, 특별히 신고를 구분하는 기준
으로는 타당성을 결여하였다고 보았다.
제3설은 일본 진언종의 학자 산성山城 해인사海印寺의 의연방宜然房 명
도明道의 설이다. 그가 저술한 『해인현담海印玄談』에 의하면, 승전僧詮에 이
르러 법상法相에 변화를 가져왔는데, 예를 들면 이제론二諦論의 경우, 승
전 이전에는 약리이제約理二諦였지만 승전에 이르러 약교이제約敎二諦를
시설한 것과 같은 이것이 신삼론이라 말하는 소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삼론의 교학적으로도 교세 발전적으로도 가장 현저한 변화를 본 것은 오
히려 승랑의 전후이다. 때문에 제4설을 한층 합리적이라고 고려하였다.
그 이유는, 승랑에 이르러 종래 관내關內 (장안의) 삼론학이 강남에서 비약
하였기 때문이다. 곧 당시 양나라의 삼대법사 등에 의하여 남지에서 성실
학이 전성기를 구가하였는데, 승랑이 분기하여 성실학은 소승小乘의 사상
이라고 압도하여, 삼론학을 다시 예전의 성황으로 재현시켰다. 종래 성실
학을 학습하는 이는 반드시 삼론도 겸학하는 상태였지만, 승랑에 이르러
삼론을 성실에 대립시켜 삼론의 특색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1)
1) 高雄義堅, 『三論玄義解說』, 興敎書院, 1936, pp.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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