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8 - 고경 - 2019년 10월호 Vol.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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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종 평행선인 채로

             무상의 근거를 둘러싼 논의는 ‘원시불교의 논리적·철학적 해석’을 시
           도하는 후나하시와, ‘고집스러울 정도로 문헌학자의 입장을 지키며 자료

           의 범위에서 일보도 벗어나지 않는’ 사이구사의, 방법론, 연구에 대한 자
           세의 차이로부터, 논점이 어긋난 채로 진행되어, 그런 까닭에 양자 모두

           최후까지 서로의 주장을 양보하지 않고,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한 채 끝난
           다(인용부분은 梶山 前揭論文). 후나하시가(舟橋<8>[3])에서 총괄하고 있듯이,

           그와 사이구사의 상이점은 ‘평행선적인 것’인 채로 나아갔을 뿐이었다.
             단지 객관적으로 보면, 후나하시의 해석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고, 그

           가 증거로서 제시한 경전의 일절도 겨우 “연기하고 있는 것은 무상이며,
           무상한 것은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보이는데 그쳤다고 보는 것이 자연

           스러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적지 않은 학자들이 최종적으로 사이구사의
           쪽에 손을 들어준 것은 무리도 아닐 것이다.

             동시에 ‘무상―고―무아’와 연기설의 사이에는, 적어도 초기불교에 있
           어서는 어떠한 관련도 연결도 없고, 동시에 “‘연기라는 사상 그 자체’를

           가지고, 무상이나 고나 무아나 또 4제를 설명 해석하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다.”(三枝<04>[2])고 하는, 사이구사의 엄격한 자료해석도 너무

           시야가 좁지 않은가 하는 위화감을 감출 수 없다.
             잠시 논쟁을 떠나 시점을 바꿔, 이 문제를 고찰해보기로 한다.



             “왜 무상인가”를 묻는 것의 무의미

             본래 ‘무상의 근거’를 묻는 것에, 의의가 특히 불교적인 의의가 인정되
           는 것일까. 예를 들면 “이 세상의 일체가 무상이다.”라고 하는 것에, 그

           세계 안에서 “왜 무상인가?” 하는 물음을 일으키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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