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0 - 고경 - 2019년 10월호 Vol.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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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담당하는 것은 주로 후천적으로 획득된 언어에 의한 분별이다.

             그러나 본능과 언어가 아무리 강고하게 아나 사물을 상주하는 실체라
           고 세뇌시켜도 마침내 사물은 소멸하고 자신은 나이가 들어 늙고 병들고

           죽는다. “무상하지 않다.”라는 믿음에 사로잡힌 자가 “무상하다.”는 현실
           에 직면했을 때 고가 일어난다. 여기에서 말하는 고란 언어의 허구성에

           대한 폭로에 지나지 않는다.
             이 고를 가져오는 우리들 인식의 관습, 실각實覺의 체제를, 심신과 지知

           의 수련에 의해 해체하는 것이야말로 불교의 목적인 것이다.
             후나하시는 『니카야』 전체를 통하여 “무상의 논리적 근거는 여전히 추

           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붓다는 “왜 무상인가 라는 것에 대
           해서는 어느 것도 설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舟橋 前揭書). 경전에서 무

           상은 언제나 무전제로, 때로는 당돌하게 등장하여, 자명한 것으로 취급된
           다. 그 원인과 기원에 대해 말하는 일은 없다. 후나하시는 이것을 의문시

           하여, 초기 경전을 ‘비평적으로 연구하여’ 무상의 근거를 찾아내려고 한
           다. 스스로 무상이 논리에 의해 도달된 결론이 아닌 것을 인정하면서 논

           리적으로 그 탐색을 시작한다.
             하지만 무상에 근거 등은 없다. 앞에서도 말했고, 앞으로도 반복해 서

           술하지만, 무상의 일단은 일상적인 실감實感에서도 알 수 있다. 단지 대다
           수를 신해信解하고, 전체에 육박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습을 필요로 한

           다. 무상은 그러한 전제적인 사실이며, 불교에서는 절대적이다. 이 ‘절대
           적’이라는 의미는, 예를 들면 ‘불변적인 것’ ‘상주인 것’ ‘동일적인 것’이 어

           딘가에 있어, 그것과의 대비에서 성립하는 것과 같은 상대적인 ‘개념’ 등
           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철학자 나가이 히토시永井均은 불교의 무

           상의 개념을 비판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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