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4 - 고경 - 2019년 10월호 Vol.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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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된다. ‘언어표현’은 실체로 구성되는 그 세계가 ‘생·멸’하
고 ‘변화’한다고 거짓을 말하지만, ‘언어표현’에 매몰되는 인간
은 그것을 납득한다. 그와 같은 일상적인, 뿌리 깊은 구속이
우리들을 실체로의 집착으로 끊임없이 결부시켜 간다.”(前揭書)
야마구치는 계속하여, 그 집착의 ‘가장 궁극적인 것이 ‘죽음’의 공포’라
고 결론을 내린다. 이것은 중관파의 대학장大學匠 샨타라크쉬타의 교설을
참조하면서 세운 시간론이지만, 본래 언어표현으로는 익숙지 않은 무상
의 구조를 추론으로서 끝까지 추구해간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본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고 한 까닭에 대단히 난삽한 표현이
되어버렸다.
좀 더 부언하면 다니 타다시谷貞志는 이 야마구치의 무상론에 대하여,
“칸트철학과 같이 현상의 선험적 조건을 구성하는 듯한 초월론적인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지각과 추론에 있어서 말할 수 없는 것
과 같은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야말로, ‘역시적歷時的 인과’의 형이상학이
아닐까?”라고 당연한 의문을 제시하고 있다(『刹那滅の硏究』 春秋社)
단 야마구치에 있어서 ‘제1의 시간’과 ‘역시적 인과’가 “지각과 추론에
있어서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지나친 평가일 것이다. 그것은 ‘선험
적’이라고는 해도 선험적 사상事象은 아니다. 확실히 범부에게 있어서는
‘제1의 시간’을 정확히 지각하는 것은 곤란할 것이지만, 그러나 전혀 지
각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지각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고苦
인 것을 느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죽음’의 공포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발심하는 계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수마나사라Sumanasara도
“무상은 어떠하든 간에 경험, 체험할 수 있다. 따라서 현상의 관찰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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