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8 - 고경 - 2020년 1월호 Vol.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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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개설이 메이지 정부의 핵심 기관인 도쿄대학에서 이루어 졌다. 그러면
왜 불교계는 근대의 출발과 함께 빈사의 경지에 빠지게 되는 것일까. 먼
저 근대불교학의 성립배경으로서 메이지유신과 폐불훼석廢佛毁釋의 불교
탄압을 살펴보기로 한다.
탄압과 환골탈태
1868년 근대의 출범으로서 닻을 올린 메이지유신은 서구의 과학문명
을 받아들여 전사회적인 개혁을 도모한 혁명으로 출발하였다. 그렇지만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의 260여 년에 걸친 권력의 체제를 전복시킨 메이
지 유신은 정치의 중심에 천황天皇을 두고, 이 천황제를 이념적으로 지지
하는 신도神道를 국교로 하는 새로운 국가체제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이
것은 천황중심의 정치체제에 신도국교화神道國敎化의 종교정책을 이념으
로 삼아 정책을 펼치고자 한 것이지만, 국가를 서양 제국과 같은 과학기
술에 바탕을 둔 정책 실현이라는 입장에서는 모순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
황이었다. 곧 천황을 중심에 둔 신도국교화 정책으로 고대의 율령체제 속
에 최고의 권력기관이었던 신기관神祇官 등을 부흥시켜 종교정책을 실시
하지만, 실제 과학기술을 통한 국가개조는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여야 하
는 변화된 시대의 조류를 전제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모순
적 상황이 전개되는 속에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이 불교계로서, 불교계
의 입장에서 메이지유신은 가히 불교탄압의 폭풍우가 다가오는 형상에
놓였다고 말할 수 있다.
천황을 중심에 두는 신도국교화라는 새로운 종교적 질서 속에 불교
는 가히 역사상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현상에 직면하였다. 다시 말해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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