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0 - 고경 - 2020년 1월호 Vol. 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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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적인 역할을 인정하는 교부성이 설치되는 1872년까지 극단적으로 이

           루어진다. 한 두 개의 예를 들어보면,  메이지유신의 한 축을 담당했던 사
           츠마薩摩 지역에서는 당시 존재하였던 대소大小 사원 1,066개가 거의 폐

           사되고, 2,964인에 달하는 출가자들도 모두 환속 당했다고 한다. 또 도야
           먀번富山藩에서는 하나의 종파에 하나의 절만을 남겨두는 일종일사령一宗

           一寺令을 시행하여, 370여 개의 절을 8개로 줄이는 극단적인 합사合寺 정
           책이 실시되었다.

             이 도야마번의 정책은 결국 실패로 끝나지만, 메이지 정부 차원에서
           신불분리령이 불교를 탄압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는 포고령을 내리기에

           이른다. 일본 전역에서 불교에 대한 탄압이 본격화되는 것이 메이지유신
           으로 인한 사회적 현상으로, 불교계로서는 가히 빈사의 위기에 빠질 수밖

           에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불교계의 근저根底를 뒤흔든 이러한 폐불훼

           석의 조류는 메이지유신이라는 새로운 사회기조 속에 불교계를 환골탈태
           換骨奪胎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곧 불교계에 대한 극단적인 억압은 불교

           정신에 투철한 진정한 불교인을 확인하는 기회를 만든 것이다. 다시 말해
           근세 이래 국가의 지배계급으로서 위상을 가졌던 불교가 그 위상이 급격

           히 추락하고 더 이상 불교계에 몸담는 것이 큰 이득을 가져올 수 없음을
           알 수 있는 상황에서 진정한 불교가를 확인하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이렇듯 근대초기에는 사찰이 국가의 행정기관으로서 그 역할을 하던 근
           세기의 위상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불교계를 담당하는 종교정책 부서조

           차도 없는 형국이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불교 무시의 정책과 풍조 속에 불교계는 자립적으로

           여러 종단이 서로 결속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길임을 확인하였고,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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