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9 - 고경 - 2021년 2월호 Vol.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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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 불교 신자 모례毛禮의 집을 중심으로 은밀히 교화를 펼쳐나갔다는 견
해 등이 잇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고증할 방법이 없는 형편이다.
묵호자와 아도를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와 다르게 보는 견해도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실린 내용에 의하면, 먼저 ‘아도’라는 명칭부터
따져보아, 아도阿道는 아도我道 또는 아두阿頭라고도 하는데, 아도阿道를 아
두阿頭라고 하면 ‘머리카락이 없는 승려’를 일컫는 일반명사이므로 아도는
특정인의 이름이 아니라 소지왕(=비처왕) 때 신라에 들어온 고구려의 승려
를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반면 아도 화상을 아도我道라고 하면 「아도본
비我道本碑」에 쓰여 있는 것처럼 위魏나라 사신이었던 아굴마我掘摩가 고구
려에 왔을 때 고구려 여인 고도녕高道寧과 정을 맺어 그 사이에서 태어난
고구려의 승려라고 특정할 수 있다고 본다. 후자에 따르면, 아굴마의 아들
인 아도는 5살 때 어머니에 의해 출가하였으며 16세에는 위나라로 가서 자
기 아버지인 아굴마를 만났다. 그는 아버지에 의해 현창玄彰 화상의 문하
에서 불법을 배우고 19살 때 고구려로 돌아왔다. 그러자 어머니인 고도녕
이 그에게 신라로 갈 것을 권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그 나라
는 아직 불법을 알지 못하지만, 앞으로 삼천여 달이 지나면 계림에 성왕이
나서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이다. 그곳의 서울 안에 절터가 일곱 곳이 있으
니, 하나는 금교 동쪽의 천경림[興輪寺]이요, 둘째는 삼천기[永興寺]이며, 셋
째는 용궁 남쪽[皇龍寺]이요, 넷째는 용궁 북쪽[芬皇寺]이며, 다섯째는 사천
미[靈妙寺]요, 여섯째는 신유림[四天王寺]이요, 일곱째는 서청전[曇嚴寺]이니
모두 전불前佛 때의 절터이다. 법수法水가 깊이 흐르는 땅이니 네가 거기로
가서 대교大敎를 전파하면 마땅히 그 땅의 불교의 초석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아도 화상은 263년(미추왕 2) 신라로 들어가 불법을 펼치고자
했으나 어려워 속림續林에 있는 모록毛祿의 집에 3년을 숨어 있었다. 26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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