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7 - 고경 - 2021년 2월호 Vol. 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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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익운景鵬益運-경운원기擎雲元奇로 이어지는 선암사의 강맥을 동시에 계
승하였다. 1910년대에 화엄사의 진진응震應, 선암사의 장기림(錦峰)과 함께
불교계의 3대 강백講伯으로 평가받기도 하였다. 이렇듯 박한영은 19세기의
불가 지식의 계보를 잇는 한편으로 20세기 근대 불교학의 동향에도 상당
한 조예를 가진 인물로 명성을 얻었다. 바로 이 지점이 불교고등강숙의 숙
장으로 그를 초빙한 이유이자, 1910년대 후반부터 국내는 물론 해외에 유
학한 불교유학생들이 그를 정신적 좌장으로 삼았던 이유다. 이는 또 1920
년대 이후 최남선, 이광수, 정인보 등 지식인이 국학 연구의 중요 원천지식
제공자로서 그를 신봉했던 이유기도 하다. 박한영이 ‘청년靑年 승계僧界의
사조思潮를 좌우左右’한다는 이능화의 기록(『조선불교총보』 4호 p.1, 1917.6)은
공연한 찬사가 아니다.
최동식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데, 『해동불보』에 여러 필명으
로 등장하여 존재감이 매우 크다.(猊雲散人, 晩香堂, 曹溪沙門, 菊人惠勤, 秋堂道
人, 槐翁道人, 猊雲惠勤, 晩香堂惠勤, 晩香堂野人, 浮玉山人惠勤, 晩香堂秋人, 秋堂菊
人, 晩香堂菊翁, 餐菊老人, 秋堂餐菊老人, 曹溪沙門猊雲, 曹溪沙門惠勤, 南郭子) 창간
호에 수록된 그의 자축 한시(「自題六十三回生日淸凉寺」)에 보면, 그는 1913년
8월11일 63회 생일을 맞이하여 청량사에 주석하였다. 이를 역산하면 그는
1851년생으로 박한영보다 20세 선배가 된다. 그는 이능화의 『조선불교통
사』(1917)에도 서문을 썼는데, 이능화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신라 문창후 최
치원의 후손으로, 집안은 대대로 호남에 살았다. 조계산 선암사에서 출가
득도하였으며, 경붕익운 대사 밑에서 공부하였다. 이미 불학은 넉넉했으며,
아울러 세속의 전적들도 익혔다. 요즘 승려사가 그의 손에서 많이 나왔는
데, 진실로 윗대에 부끄러움이 없다.’라 하였다. 아마도 그는 박한영의 스
승인 경운원기와는 법형제였을 것이다(사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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