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6 - 고경 - 2021년 3월호 Vol.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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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자신을 극한의 실험대 위에 올려놓았다. 비록 짧
았지만 굵은 영혼의 궤적을 그렸으며, 덕분에 한 세기가 지난 지금 근대 불
교인 가운데 가장 뜨거운 연구의 대상으로 부상했다. 근대적 질병에서 벗
어나지 못하는 한 그의 강열한 정신성은 언제든 소환될 것으로 본다.
그는 동본원사를 본산으로 하는 정토진종 오오타니파大谷派의 승려로
도쿄대에서 서양철학과 종교철학을 배웠으며, 당시 불교철학화를 시도한
이노우에 엔료의 철학회 창설에도 관여했다. 후에 동양대학이 된 철학관
에서 심리학과 철학사를 가르쳤다. 교토부 진조尋常중학교 교장과 도쿄 진
종대학(현재 교토시 오오타니 대학)의 학감으로 일하기도 했다. 1890년부터 엄
격한 금욕생활에 들어가 모든 향락과 일상의 취미로부터 결별했다. 구도
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찾고자 한 것이다.
투철한 자기 수련 속에서 1892년 『종교철학 해골骸骨』을 간행하고, 다음
해 시카고 만국종교대회에 영문판을 내놓았다. 최소한의 금욕, 철저한 지
계持戒 생활은 4년 뒤 폐결핵을 초래했다. 1896년 교토부 시라카와촌白川
村으로 옮겨 종문개혁운동을 시작했다. 『교계시언敎界時言』을 발행, 자종의
근대적 교육제도의 확립을 제언하고 교단개혁을 외치는 가운데 지도자들
과의 대립으로 제명되기도 했다. 1898년부터는 도쿄에서 사숙인 고코도浩
浩洞를 열었다. 월간잡지 『정신계精神界』도 발행했다. 이곳에서 향후 진종학
을 수립하고 종문의 대학을 이끌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모든 에너지를 소
진시킨 기요자와는 1903년 폐결핵의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그의
후예들이 교단 곳곳에서 그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사실 그는 교단 내에서는 거물이었지만 불교학계로부터는 거의 조명을
받지 못했다. 스즈키 다이세츠나 시바 료타로 등 몇몇이 그를 높이 평가했
지만 사상적인 측면은 거의 사장되어 있었다. 2000년대에 들어와 전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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