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49 - 고경 - 2021년 5월호 Vol.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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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지만 한국과 관련된 학내 문제에 반발하여 다음 해에 그만두고 돌아왔
다. 비록 짧은 유학 경험이었지만 근대의 새로운 문명을 접했고, 또 안창
호, 이광수, 홍명희 등과 친분을 맺었다. 최남선은 조부가 존경했던 개화
파의 유대치가 불교에 애정을 가졌다는 이유로 어려서부터 불교에 호의를
가졌는데 10대 후반에 『금강경』을 읽을 정도였다. 그는 일본에 갔을 때 불
교의 사회적 영향력이 매우 크고 특히 철학적으로 불교가 주목받는 모습
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귀국 후 1907년에는 일본에서 인쇄기를 들여와 신문관을 설립했고, 교
양서와 전문서, 국문소설 등 다양한 분야와 주제의 책들을 간행했다. 1908
년 11월 1일 잡지 《소년》을 발간했고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를 발표하는 등
언문일치의 신문학운동을 벌였다. 《소년》 창간호에 실린 “철썩 철썩 쏴아!
때린다. 부순다. 무너버린다.”로 시작되는 〈해에게서 소년에게〉는 의인화된
바다가 새 시대의 주역인 소년들에게 현실을 이겨내고 미래를 끌고 나가달
라고 당부하는 내용이다. 이어 1914년에는 대중 계몽을 위한 문학잡지 《청
춘》을 펴냈다.
1910년 10월에는 조선광문회를 설립하여 고전과 고서, 역사서를 편찬했
는데 출판은 신문관에서 했다. 1918년까지 20여 종의 고전이 나왔고 여기
에는 박은식, 장지연, 주시경 등 당대 일류의 학자들이 참여했다. 『동국통
감』,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의 역사서, 『택리지』, 『동국세시기』, 『해동제국
기』, 『훈몽자회』, 『용비어천가』, 『지봉유설』, 『성호사설』, 『열하일기』 등 다양
한 문헌과 『율곡전서』, 『이충무공전서』와 같은 전집류도 펴냈다. 또한 『대한
역사』, 『대한지지』, 『외국지지』 등의 근대적 역사지리서와 최초의 국어사전
및 현대식 한자 사전도 간행되었다. 이처럼 조선광문회와 신문관은 근대
한국학의 형성에 산파 역할을 했는데, 상중·하 2책, 총 1,268쪽에 달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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