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0 - 고경 - 2021년 5월호 Vol.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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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질의 『조선불교통사』(1918)도 최남선이 교열하여 신문관에서 냈다.
최남선은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했고 이 일로 2년
8개월간 옥살이를 했다. 1924년에는 《시대일보》를 창간하는 등 언론인으
로서의 활동도 했으며, 1925년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는 모임인 계
명구락부에 참여했다. 1920년대 이후 그는 역사와 조선학 연구에 매진했
다. 특히 민족의 기원을 탐색하고 민족사를 서술하는 데 관심을 가졌으며
그 결과로 1926년 ‘불함(不咸, Părkăn) 문화론’를 주창했다. 그에 의하면 인
류 문명은 인도 유럽과 중국 계통, 그리고 밝음에서 기원한 불함 계통이
있다고 하며, 고대 극동 문화의 열쇠이자 핵심으로 단군을 지목했다. 1928
년부터는 『조선사』 35책을 펴내는 조선사편수회의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조
선사에 단군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역사에 대한 그의 관심은 『조선역
사』, 『단군론』, 『삼국유사해제』 등의 저서에서도 알 수 있다. 또한 불교에 대
한 이해도 높아져 1930년대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의 강의를 맡기도 했다.
최남선은 1930년대 중반부터는 ‘전향’을 하여 뚜렷한 친일 행보를 보였다.
그는 조선과 일본 문화의 뿌리가 같다고 주장하며 신도神道의 보급에 힘쓰
고 심전心田개발운동에도 가담했다. 1936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가 되었고, 중일전쟁 발발 후 1938년에는 만주로 가서 《만몽일보》의 고문
이 되었으며 다음 해에 만주 건국대학의 교수로 부임했다. 이 무렵 <전쟁
과 교육> 같은 글을 써서 일제의 중국 침략을 노골적으로 지지했다. 1941
년에는 흥아보국단, 조선임전보국단에 참여했고 <나가자 청년학도야>, <아
시아의 해방> 등의 글을 신문에 실었다. 1943년에는 일본에 유학한 학생들
에게 학도병 지원을 권하는 강연 등을 했다. 이러한 친일 행적은 그의 이
력에 주홍글씨를 남겼는데, 해방 후 3년 반이 지난 1949년 2월에 반민족행
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었지만 반민특위가 친일파 출신 경찰에 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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