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7 - 고경 - 2021년 5월호 Vol.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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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진리, 소멸될 수밖에 없는 모든 현상이나 존재가 사라지며 보여주는 진
             리, 바로 ‘존재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가치’를 깊이 증득證得한다. 「어느 하나
             향기로운 집 한 채가 아니랴」는 시詩에서다.




                  가을걷이가 끝난 빈 밭고랑이
                  쪼그리고 앉았다
                  빼앗을 건 다 빼앗아

                  뿌리마저 뽑혀 말라비틀어진

                  세상의 바닥,
                  생애의 반은 잊혀지고,
                  그 나머지 반은 허전하다




                  그런 곳으로도 새들은
                  먹이 찾아 날아들고
                  간혹 비닐도 날려 와 허리를 쭈욱 펴고

                  너덜너덜 쉰다

                  땅의 한 구석엔 고요가
                  국화꽃처럼 노랗게 피어 익어가고,
                  가을 벌떼 윙윙대며 꿀을 퍼 날라

                  극락전을 짓는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그냥 막 살아 온 것 같아도

                  어느 하나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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