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8 - 고경 - 2021년 5월호 Vol.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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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로운 집 한 채가 아니랴
- 「어느 하나 향기로운 집 한 채가 아니랴」 전문 -
“뿌리마저 뽑혀 말라비틀어진 세상의 바닥”에 발붙이고 사는 시인의 생
애는 “반은 잊혀지고, 그 나머지 반은 허전하다.” 반은 잊혀지고, 반은 허전
한 생애는 아무 것도 아닌 생애다. 그런 생애의 바닥에 새, 비닐, 국화꽃, 가
을 벌떼들이 날아와 어울려 산다. 다른 존재를 해코지 하거나 괴롭히지 않
고, 자기가 필요한 것을 바닥에서 찾으며 살아간다. 낡아 빠진 비닐마저 간
혹 허리를 펴고 자신을 자랑한다. 벌들은 ‘진언眞言’을 소리 높여 외우며 극
락전을 짓는다. 벌들이 내는 “윙윙”소리는 ‘입으로 지은 나쁜 업業’을 씻어내
는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이다. 구업口業을 깨끗이 하며 극락전을 짓는다. 벌
들은 그렇게 가을 동안 공덕을 쌓아 겨울에 대비하고, 자신과 후대들이 먹
을 꿀을 열심히 모은다. 꿀을 모으는 것이 극락전을 건립하는 불사佛事다.
결국 시인은 그런 현상 속에서 “그냥 막 살아 온 것 같아도/ 어느 하나/ 향
기로운 집 한 채가 아니랴”며 뛰어난 ‘승의의 진리[勝義諦]’를 체득한다. 시인
은 빈 밭고랑에 쪼그리고 앉아 제행무상을 넘어선 승의제를 몸으로 깨닫는
다. “그냥 막 살아온 것 같은 인생”도 실은 ‘진리의 현현顯現’임을, 모든 존재
는 그 자체로 의미 있음을 증득證得한다.
그래서 시인도 점차 원만한 인격을 가진 존재로 변한다. 「독도여래」, 「진
짜 내 글씨 한 줄」, 「발밑을 보라」, 「지옥에서 쫓겨난 어둠이 걸어간다」, 「일
면불 월면불」, 「학문은 항문이다」 등이 그런 과정을 노래한 시들이라 생각
된다.
고독하지 않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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