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0 - 고경 - 2021년 6월호 Vol.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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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한 그 열정들이 쌓여 오늘날 불교학이 세계적 시민권을 갖는 발판이
되었음은 재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물론 그 또한 1904년 러일전쟁 당시
만주 야전병원의 간호병으로 전쟁의 일부가 되기도 했다. 국민국가의 부속
품으로 전략한 젊음이 전쟁의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징집될 때, 그는 배낭
속에 독일어 서적과 사전을 넣고 떠났다. 제대할 때는 독일어 책을 자유롭
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영어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
다. 언어 습득 능력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훗날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그리고 한문 경전 해독 능력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일찍이 기무라의 총명을 알아본 사람은 그의 고향인 이와테현 니시네촌
의 조동종 사찰 동자사東慈寺 주지 무라야마 지츠조였다. 소학교를 졸업하
고 양조장에서 일하던 그를 제자로 받아들여 교육을 시켰다. 후에 스승이
열반하자 20대 주지가 되었다. 1900년 조동종 대학(현 고마자와 대학, 사진 2)
에 입학, 1903년 졸업과 동시에 동경제국 대학에 다시 입학했다. 그가 가
르침을 받은 학자들은 일본 최초의 철학교수였던 이노우에 테츠지로, 인
도철학과의 초대교수였던 무라카미 센쇼, 범어학 강좌를 개설하고 『대정신
수대장경』 등 여러 대장경 편찬을 주도한 다카쿠스 준지로, 일본 종교학
연구의 토대를 놓은 아네사키 마사하루 등이었다.
기무라는 이들 근대 일본학을 구축한 쟁쟁한 학자들의 그늘에서 독자
적인 학문의 길을 터득했다. 1909년 졸업, 1912년 같은 대학 문과대학 강
사로 재직했다. 이후 타계하기까지 약 20년 동안 연구, 교육, 계몽운동에
몰두했다. 그 사이 약 2년 반 정도를 영국에서 인도철학을 연구하기도 했
다. 그곳에서 1882년 팔리성전협회를 창립한 리스 데이비스를 만나 학문
적으로 교류했다. 비록 아쉬운 50세에 먼 길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업적
은 불교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데에 이견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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