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35 - 고경 - 2021년 6월호 Vol.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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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불법의 무위無爲 속에서 활달하
며 강직했다. 인정과 이타심 또한 두터웠
다. 자신의 생활 리듬을 개의치 않고 강
연이나 원고 의뢰도 거부하지 않았다.
제자들에게 “나는 개척자로서 3, 4척尺
앞을 대충 경작해 나가므로 후진들이 보
다 깊게 파야 한다.”고 열린 마음으로 말
했다. 또한 어떤 논제를 규명하고자 할
때는 “먼저 문제 전체의 전망을 하라.”고
했다. 자료 전체를 수집하여 단지 정렬
사진 4. 『해탈을 향한 길』.
만 하는 것은 반드시 좋은 연구법은 아
니다. “논문을 쓸 때는 가능하면 재료를 버려라.”라고 했다. 자신도 참고서
를 제쳐놓고, 오직 원전 자료만으로 논을 세웠는데, 이는 사상의 독립을
방해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어쩌면 일본불교가 문헌중심의 연구로 폐쇄적인 연구풍토가 될 것을 염
려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불교야말로 언어에도 매이지 않는 활달한 학문
의 세계임에도 연구자들은 문자주의를 신봉한다. 오늘날 일본불교 연구의
성과는 세계적이라고도 하지만, 상상력의 빈곤에 처해있다고 비판받는다.
사바세계에서 활발발活潑潑한 삶을 불태웠듯 기무라는 우리에게 늘 창조
적이며 개방적인 사고, 애초에 어디에 구속됨 없는 독존적 자유를 누리라
고 일침을 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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