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53 - 고경 - 2021년 7월호 Vol.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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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송원松原 설정雪靖 대종사가 쓴 것
             이다.
               개심사의 사역은 그렇게 크지 않았

             고 근래 지은 당우들이 들어서서 건물

             들이 많아졌다. 내가 머물 때는 몰랐지
             만 그 후에 불화들이 많이 발견되었고
             경판들도  보배로운  것으로  인정받아

             이제는 보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이러

             한 점으로 미루어 보면, 개심사는 중요
             한 사찰로 활발하게 활동한 것으로 보

             인다. 개심사는 특히 조선시대 추사秋
             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선생의 집안

             과 인연이 있어 번창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12-4. 개심사 팔금강도.
               추사 선생의 10대조 김연(金堧, 1494-?)

             이 서산에 자리 잡고 그 후손들이 살게 되면서 벌족을 이루어 김흥경(金興慶,
             1677-1750) 때는 영의정을 하였고, 그 아들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은 영조의

             사위가 되었으며 예산 용궁리 일대 땅을 별사전別賜田으로 받아 지금의 ‘추
             사고택’을 짓고, 아버지를 위하여 예산의 화암사華岩寺를 원찰로 중건하였
             다. 판서를 지낸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둔 추사 선생은 그 증손이 된다. 아

             무튼 이들 경주 김씨 집안인 김연의 어머니 묘를 절 건너편에 쓰고 나중에

             아버지의 묘까지 이곳으로 옮겨오게 되면서 개심사는 이들 김씨 집안과 긴
             밀한 인연을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이고, 그에 따라 사세도 좋아졌을 것으로
             보인다.

               개심사에 머물며 공부하던 시절 거기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나중에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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