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7 - 고경 - 2021년 7월호 Vol.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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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 설립을 준비하면서 여징을
부르자 그는 남경으로 돌아갔고,
이후 스승인 구양경무를 도와 불
교 발전과 연구로 인생 방향을 전
환하게 된다. 1922년 그는 구양경
무를 도와 지나내학원을 설립하 사진 1. 여징. 바이두 캡쳐. 사진 1. 만년의 여징.
바이두 캡쳐.
였고, 이후 본격적인 불교 연구자
의 길에 접어들었다. 이 때 여징은 지나내학원에서 강의와 교무부장을 담
당하였고, 구양경무의 또 다른 제자 왕은양(王恩洋, 1897-1964)과 함께 유식
학을 강의하였다. 그는 “학문을 강의하여 경전을 새긴다.” 즉 불교를 강의
하여 세상에 불교적 가치를 새기겠다는 자세로 임하였다고 한다.
경전 교감과 유식학 연구
여징은 전통적인 불교 연구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동시에 일본에서
전개된 근대적 불교학의 내용을 소개하고 국외의 불교학 연구 성과를 수
용하였다. 예컨대 일본 불교학자 후카우라 세이분의 『불교연구법』과 『불교
성전개론』을 번역 소개하였다. 이렇게 근대적 불교학 방법론을 모색하는
여징의 작업은 양계초와 맥을 같이 하였고, 이 두 학자는 중국에서 근대
적 불교학이 성립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여징은 경전 교감이
라는 전통적인 불교연구 방식을 고수했음에도 그의 학문적 연구와 논문들
은 매우 근대적이었고, 이 점에서 그는 스승인 구양경무와 달랐다.
구양경무는 지나내학원에서 다양한 경전을 교감, 편찬하여 발간하였는
데, 그의 교감 정신을 가장 잘 보여준 경전은 『장요藏要』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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