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8 - 고경 - 2021년 7월호 Vol.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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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양경무는 대장경 전체는 아니지만 대장경의 핵심적인 문헌을 추려 정밀
하게 교감하고 교감주를 달아 정본을 확정 간행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장
요』이다. 전체 3집으로 이루어진 『장요』는 73종, 400여 권의 불서를 포함하
고 있으며, 제1집은 1929년, 제2집은 1935년, 제3집은 1985년 간행되었다.
이때의 교감 작업에 여징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그는 많은 문헌의
다양한 판본들과 다양한 번역본을 대조하였다. 구양경무는 산스크리트 원
본이나 티베트역본을 읽을 수 없었고, 따라서 이러한 교감 편찬 작업들은
여징이 주로 수행했다(사진 2).
이처럼 여징은 스승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경전 교감과 유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여징은 “나의 불교 지식은 구양경무에게 연원하지만, 내가 불
교 연구에서 일정한 수준에 도달한 것은 구체적인 연구 과정을 통하여서
였다. 나는 『장요』 편찬 당시 한문, 산스크리트어, 팔리어, 티베트어 등 각
종 판본의 불전을 섭렵하였는데, 이 때문에 나의 불교 연구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1924년 창간된 지나내학원의 학술잡지인 『내
학內學』에 문헌학에 기반을 둔 교리의 변천과 전개를 연구한 논문들을 다
수 발표했다. “『잡아함경』 간정기”, “『현양성교론』 대의”, “『장엄경론』과 유
식고학”, “티베트 전승 『섭대승론』” 등 대단히 정교하고 깊이 있는 글들이
었다. 여징은 유식학이 초기불교의 전통을 잇고 있다고 생각하고, 유식학
연구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인명학의 부활
여징은 1926년 『인명강요因明綱要』를 간행하였는데, 종宗·인因·유喩 삼지
작법 등 인명학의 기본적인 개념과 이론을 설명하였다. 삼지작법은 주장, 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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