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5 - 고경 - 2021년 7월호 Vol. 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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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에 낙양의 천궁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는 기록은 옥천사에 머물게 되면
             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이는 남종선의 혜능 역시 국가로부터 허락
             을 받지 않은 ‘사도’였기 때문에 홍인 문하를 갑자기 떠난 경우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신수는 옥천사 동쪽으로 칠리七里 떨어진 곳의 땅이 평탄하고 산세가 웅
             장한 것을 보고 “이곳은 바른 능가楞伽의 고봉孤峰이며, 도문度門의 난야(蘭
             若, 사찰)로서, 그늘진 소나무 아래 풀을 깔고 앉아, 나는 늙어가는구나.”                    6)

             라고 말하였다는 기록으로부터 생을 마치도록 이곳에 주석하기를 원하였

             음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신수 대사에게 배우러 온 이들이 넘쳐 마치 도
             시와 같았으며, 당堂에 오른 이가 70명이고, 도道를 맛본 이들이 3천이라
             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고 한다.           7)

               이 시기에 당조唐朝는 76년 만에 중국 역사에서 유일한 여성 황제인 측

             천무후(則天武后, 재위 690-705)에 의하여 주周가 건국되면서 일단 왕조가 바
             뀌지만, 측천무후의 사후에 다시 복원된다. 측천무후는 ‘주’를 건국하면서
             도교를 중시하던 이당李唐과의 차별을 위하여 불교를 중시하였다. 특히 측

             천무후는 태종太宗의 사후에 당시 관습에 따라 2년간 출가한 경력까지 있

             으며, 황제에 즉위하기 위하여 『대운경大雲經』이라는 위경을 이용한 것은
             불교사에 유명하다. 측천무후는 화엄종華嚴宗의 법장法藏과 동산법문 출신
             의 신수와 노안老安, 지선智詵 등을 제도帝都로 불러들였으며, 혜능 역시 초

             청하였지만 응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여러 정황상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6)  앞의 책, “此正楞伽孤峰, 度門蘭若, 蔭松藉草, 吾將老焉.”
             7)  앞의 책, “華陰之山學來如市, 未云多也. 後進得以拂三有超四禪, 升堂七十, 味道三千, 不是過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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