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18 - 고경 - 2021년 8월호 Vol. 100 - 별책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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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 고도화될 수 있다. 그런 이해능력을 분별지分別知라고 부른다면, 중생 인
          간의 지적 역량은 대부분 이 분별지에 속한다. 그런데 선문의 언어는 이 분별지

          문법/범주/체계/계열 자체에 ‘빠져들지 않는 마음 자리/국면’을 일깨워 주는 장
          치이다. 이 ‘빠져나오게 하는 언어’를, ‘빠져 있고 갇혀 있는 언어능력’에 의거하

          여 ‘분별범주 내의 의미’로 이해하면서도, <선문 언구의 낙처落處를 알았다/깨달
          았다/체득했다>고 오인하는 경우가 빈발했을 것이다. 일종의 ‘범주 착오의 오류’

          이다. 이와 더불어, ‘분별 계열에 빠져들지 않는 마음 국면’을 담아내고, 또 그 국
          면으로 이끌어 들이려는 선종의 언어를, ‘논리적 총명에 의한 이해방식’으로만

          소화하려는 시도들도 줄기차게 이어졌을 것이다. 이런 현상들은 현재에도 여전
          하다. 선종 내부에서는 이러한 ‘범주 착오 현상’과 ‘이해방식에 의한 읽기’들을 제
          어하면서 선어禪語 본래의 지평과 맥락을 보호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언어들

          이 누적적으로 발전한다. 분별지 범주의 이해를 막아버리는 동시에, 제대로 알았
          는지를 점검하기 위해, 겹겹의 언어 관문을 시설한다. 이것이 후기 선종으로 갈

          수록 ‘선지禪指 굴리는 언어방식이 복잡하게 꼬이고 이해를 막아서는 겹겹의 관
          문이 설치되는 특수한 방식’이 고도화되어 간 이유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선문

          언어의 후반부 양상이 보여주는 특징은 이런 맥락에서 발생한 것이다.



           필자는, 몽중일여夢中一如와 숙면일여熟眠一如를 거론하면서 오매일여寤寐一如

          경지를 강조하는 성철의 의중을 이런 맥락에서도 접근할 수 있다고 본다. 역대
          선장禪杖들이 사용한 선지 언구와 격외선지들을 흉내 내면서 법거량法擧量하자며

          왕래하는 숱한 학인들, 분별지 범주의 이해를 막고 제대로 알았는지를 점검하기
          위해 시설된 겹겹의 언어 관문조차 흉내 내기로 통과하려는 학인들을 보면서, 성
          철은 ‘언어 관문’의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경험적 관문’을 모색했을 것이다. 그

          ‘자기 점검의 경험적 준칙’이 오매일여寤寐一如일 수 있다. 오매일여寤寐一如를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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