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4 - 고경 - 2021년 8월호 Vol. 100 - 별책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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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모든 사물에 주착住著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我)라는 아견我見을
              고집하는 사량분별을 다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모든 분별심을 떠나서

              보면 세상은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즉, 불생불멸
              不生不滅입니다. 고통이 생기면 생긴다고 보고 고통이 없어지면 없어진다

              고 그대로 봅니다. 이것은 그저 생멸을 본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때의 생멸은 변견의 생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간에서는 분별심으

              로 생멸을 보지만 여기에서는 집착하는 분별심을 떠나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분별심에서 보는 불생불멸의 생멸입니다.

              ‘모든 분별에 사로잡히지 않으며 집착하지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것
              은 모든 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쌍차입니다. 모든 생멸을 부정하고 나니

              생멸을 바로 보는 대긍정 곧 쌍조가 됩니다. 머물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므로 마음이 청정하고, 마음이 청정하면 곧 진공眞空입니다. 여기에

              서 묘유妙有가 생깁니다. 그래서 ‘괴로움이 생하면 생한다고 보고 멸하면
              멸한다고 본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변견의 생멸이 아니라 묘유妙有의 생

              멸이고  중도제일의제中道第一義諦의  생멸입니다.  이것이  마음이  광명光
              明한 것이니, 쌍차한 쌍조입니다. 차원이 다른 절대적인 견해입니다. ‘다

              른 것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은 부처에도 의지하지 않고 조사에도 의
              지하지 않아서 오직 무주심無住心, 즉 구경의 반야심만 남았다는 말입니

              다. 여기에서 바로 정견正見이 나옵니다. 의지함이 없으니 완전한 진공眞
              空이고, 의지함이 없는 반야가 생겼으니 진정한 지혜가 나타나는데, 이

              지혜를 정견이라고 합니다. 정견의 내용 역시 모든 집착심을 버리고 생
              멸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쌍차한 쌍조, 즉 진공묘유입니다. 이

              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양변을 떠난 것이 중도라는 것은 상식적으로 아는데, 그러나 양변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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