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76 - 고경 - 2021년 8월호 Vol. 100 - 별책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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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여 식이 있다는 방식은 생生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역생亦
              生이고 역유亦有입니다. 또 십이연기를 다 말하고 난 뒤에 ‘전全 고온苦蘊의

              집集’이라고 한 것은, 앞에서 집제를 바로 보는 사람은 무견無見이 없다고
              했으므로 비무非無를 말한 것입니다. 집을 바로 보는 사람은 무견이 없다

              했으니 비무이고, 생을 바로 보는 사람은 역생이니 무견이 없습니다. 역
              생이 곧 비무이고 비무가 곧 역생입니다. 역생이 곧 역유이니 비무가 내

              용적으로 역유가 되며, 생을 바로 보는 것이 곧 집을 바로 보는 것인데 그
              것이 비무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한 가지 말이 두 가지 뜻

              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멸을 바로 보는 사람은 유견有見이 없다 했으
              니, 이것이 비유非有입니다. 멸을 바로 보는 것이 비유非有인 동시에 멸을

              바로 보는 것이니, 역멸亦滅입니다. 지금 여기에서는 연기의 역관逆觀과
              순관順觀을 모두 들어서 중도라고 했습니다. 연기의 내용이 비유비무非有

              非無이면서 또 역유역무亦有亦無라는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어렵습니다. 여러 번 설명을 들어 봐야 알 수 있지 당장은 해결이 되지 않

              습니다.
              흔히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를 시간적으로 생사윤회하는 과정으로 해

              석하는데, 생사윤회하는 과정으로 보는 연기관은 후대의 한 가지 해석은
              될 수 있을지언정 부처님이 설하신 연기의 참뜻과는 근본적으로 틀린 해

              석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연기란, 연기가 곧 중도라는 말입니다. 많
              은 분들이 연기를 삼세이중인과로 이해하면서 생사윤회하는 시간적인

              해석에만 중점을 두고,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바르게 해석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남전이나 북전이나 부처님은 중도를 설하고 난

              뒤에는 증명중도로서 반드시 연기를 들고 있습니다. 어째서 연기를 증거
              로 삼았는가는 좀 깊은 이야기여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불교를 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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