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86 - 고경 - 2021년 8월호 Vol. 100 - 별책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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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 있다.
재인지 능력은 인간경험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삼아 재성찰할 수 있게 하여 ‘사
실에 더 맞는 진실’과 ‘더 나은 이로움’을 만들어 가는 길을 밝히는 등대이다. 그
러나 재인지 능력이 언제나 희망의 길잡이인 것만은 아니다. 밝은 희망만큼이나
어두운 재앙의 길로도 이끌어 간다. 재인지 능력이 ‘불변‧동일‧독자의 실체나
본질 관념’을 재인지의 대상에 투영시킬 때가 그 재앙의 출발이다. 신체 현상과
정신현상, 사회현상에 실체와 본질의 옷을 입힐 때 재앙의 큰길에 올라선다. 사
실을 왜곡하고 오염시키는 정교한 기만. 이 기만을 무기로 삼아 휘두르는 폭력의
칼춤, 그에 열광하는 무지의 광기. - 인간 특유의 이 괴물 같은 면모도 재인지 능
력에서 힘을 얻는다. ‘불변‧독자의 실체/본질 관념에 의해 일그러진 이해’를 불
교철학에서는 ‘분별分別’이라 부르곤 하는데, 이 분별의 산출과 확대재생산의 원
동력도 바로 재인지 능력이다. 재인지 능력은 그야말로 양날의 검이다. 잘 쓰면
인간과 세상을 두루 이롭게 하는 활인검活人劍이고, 잘못 쓰면 닥치는 대로 베어
죽이는 살인검殺人劍이다. 붓다는 이 재인지 능력을 활인검으로 쓰는 법을 가장
깊숙한 수준에서 확보하여 일러준 분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그의 길에 동참하려
는 후학들은 붓다가 일러준 활인 검법을 제대로 익혀야 한다. 원효는 그 활인 검
법을 탐구하여 전수하고 있다.
‘재인지 현상 및 능력’은 이해와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이해에 갇히지 않는다.
‘이해조차 재인지의 대상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 ‘재인지 현상’이기 때문이
다. 그런 점에서 재인지 현상과 이해 현상은 같은 사유 범주에 속하면서도 동일
하지가 않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사유에는 두 가지 다른 유형이 섞여 있다. 하
나는, ‘이해로 수렴되고 또 이해로부터 규정되는 사유’이다. ‘이해 사유’가 그것이
다. 다른 하나는, ‘기존의 이해 자체를 대상화시켜 처리하는 사유’이다. 과거와 현
재의 이해에 갇히지 않고 기존의 이해들을 수정‧보완‧대체하는 사유이다. ‘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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