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76 - 고경 - 2021년 8월호 Vol.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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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2개월의 체재를 마치고 티베트를 탈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3주에 걸
          쳐 다르질링으로 돌아왔다. 캘커타에서 이노우에 엔료를 비롯하여 정토진
          종 본원사파 법주 오오타니 코즈이, 승려이면서 불교학자인 후지이 센쇼

          를 만났다. 귀국을 종용받았지만 1903년 다시 네팔을 향했다. 총리, 국왕,

          법왕을 만나고 다음에 올 때는 일본의 한역대장경과 네팔의 범문대장경을
          교환하기로 약속했다. 1903년 5월에 고베로 귀환했다. 여러 신문사 및 잡
          지사에서 취재가 쇄도했다. 도쿄 시사신보나 오사카 매일신문사는 그의

          여행기를 게재했다. 또한 그가 가져온 서적, 물품은 도쿄미술관에 전시되

          었다. 또한 물품도록, 여행기 등이 출판되었다.
           그는 다시 티베트·네팔 행을 계획했다. 목적은 티베트어 및 범어 대장경
          을 구해 일본의 대장경과 비교 대조하여 일본어 대장경을 만들기 위해서

          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많은  관료들과  재야인사들이  후원했다.

          1905년 2월에 카트만두에 도착하여 약속한 한역대장경을 국왕에게 바치
          고 범어경전을 받았다. 1913년에는 다시 티베트를 향했다. 영국의 감시를
          받았지만 순조롭게 들어갈 수 있었다. 다음 해 1월 판첸 라마를 만나 대장

          경을 올리고, 8월에 라사에 도착, 옛 친구들을 만났다. 법왕을 만나 사본

          인 티베트 대장경(사진 4)을 받았다. 1년 정도 머물고 다시 귀국했다. 다시
          신문에 여행기를 게재하여 세상에 알렸다.
           당시에는 서구만이 아니라 일본도 가세하여 서역 탐험이 유행하여 많은

          불전, 고경, 불상, 회화, 각종 유물 등이 유입되었다. 영국의 오렐 스타인,

          프랑스의 폴 펠리오, 미국의 랭던 워너, 일본의 오타니 코즈이 등은 이 방
          면에 잘 알려진 사람들이다. 말이 탐험이지 문화재의 약탈이 판을 치던 시
          대였다. 가와구치는 나름의 불교적 가르침에 서고자 했던 셈이다. 1915년

          에는 철학관에서 이름이 바뀐 도요東洋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불교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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