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7 - 고경 - 2021년 8월호 Vol.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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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680-756, 혹은 684-762)은 신라 출신으로 최치원崔致遠이 찬술한 『지
             증대사비智證大師碑』에  이름이  거명되고,  또한  최인연崔仁渷의  『낭공대사
                                                                  2)
             비朗空大師碑』에는 낭공이 정중사淨衆寺를 참배하였다는 기록 이 남아있
             다. 따라서 당대에 이미 신라에까지 무상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음을 추

             정할 수 있다.
               무상과 관련된 자료는 종밀宗密의 『원각경대소초圓覺經大疏抄』 등에서 무
             상의 법맥을 언급하고 있다. 이보다 후대인 송대에 편찬된 『송고승전』과 명

             대에 편찬된 『신승전神僧傳』에 그 전기가 실려 있다. 특히 돈황본의 『역대법

             보기歷代法寶記』가 발굴되면서 보다 구체적인 법계와 행적이 밝혀졌다. 따
             라서 이를 종합하여 무상선사의 생애와 그 사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3)
               『역대법보기』에서는 “속성은 김으로, 신라왕의 족성族姓이다.” 라고 하지
             만, 『송고승전』에서는 “본래 신라국의 사람이요, 그 국왕의 셋째 아들이

                4)
             다.” 라고 ‘왕의 족성’에서 ‘셋째 왕자’로 기술한다. 더욱이 『송고승전』에서는
             부왕이 죽고 무상의 동생이 즉위하자 무상이 귀국하여 왕위를 찬탈할까
             두려워하여 자객을 보냈다는 기사 가 실려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사실
                                          5)
             이라면 앞에서 언급한 낭공대사가 정중사를 참배한 일을 기록하면서 이를

             누락시키지 않았을 것이고, 또한 『역대법보기』 등의 당대唐代에 형성된 자




             2)  이능화 편, 『역주조선불교통사』 상권1(동국대출판부, 2010.), p.489. “乾符 2년(871), 成都에 이르러 여러 곳
               을 순례하다가 靜衆精舍에 이르러 無相大師의 영당에 예경하였다. 대사는 신라 사람이다. 영정에 참배
               한 후 후세에 남긴 아름다운 일화들을 모두 들어보니, 唐帝의 導師로서 玄宗의 스승이었다. 같은 나라
               사람이면서도 그 시대가 달라, 후대에 법을 구하러 와서 그 자취를 찾게 된 것이 한스러울 뿐이었다.”
             3) 『歷代法寶記』(大正藏51, 184c), “俗姓金, 新羅王之族.”
             4) [宋]贊寧撰, 『宋高僧傳』(大正藏50, 832b), “本新羅國人也. 是彼土王第三子.”
             5)  앞의 책. “相之弟本國新爲王矣. 懼其却迴其位危殆, 將遣刺客來屠之. 相已冥知矣. 忽日供柴賢者暫來謂
               之曰: 今夜有客曰灼然. 又曰: 莫傷佛子. 至夜薪者持刀挾席, 坐禪座之側. 逡巡覺壁上似有物下, 遂躍起
               以刀一揮, 巨胡身首分於地矣. 後門素有巨坑, 乃曳去瘞之. 復以土拌滅其跡而去. 質明相令召伐柴者謝
               之, 已不見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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