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89 - 고경 - 2021년 8월호 Vol. 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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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전에 무상을 맞아들여 예배하였고,  또한 성도 현령 양익楊翌은 처음에
             는 무상을 의심하였으나 도리어 귀의하여 정중사  대자사  보리사  영국사
                                         13)
             등을 건립하는데 도왔다고 한다.  『역대법보기』에서는 다만 “후에 장구대
             부가 선법을 열기를 청하여, 정천사(淨泉寺, 淨衆寺)에 머물면서 중생을 교화

             하기를 20여년이 지났다.” 라고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14)
               『송고승전』과 『신승전』에서는 “지덕至德 원년(756) 5월[建午月] 19일 병환이
             없이 시멸示滅하였는데, 춘추가 77세였다.” 라고 한다. 그러나 『역대법보
                                                  15)
             기』에서는 무상은 보응寶應 원년(762) 5월 5일 갑자기 무주無住를 떠올리고,

             그를 불렀으나 오지 않자 비밀리에 공인工人 훈선薰璿에게 신의信衣와 17종
             의 다른 옷을 보내며 부촉하였다고 하며, 무상의 입적을 79세의 일로 설
             한다.  16)

               이렇게 여러 자료에 있어서 차이가 보이고 있으며, 또한 달마의 가사전

             법의 기사들은 당시 선종의 정통성 문제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하겠다. 이
             문제는 깊게 논하지 않겠지만, 여러 자료를 통하여 무상 선사가 성도成都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 당시 무주無住의

             보당종保唐宗과 후대의 선종에서 자파에 유리하게 편집하였다고 추정된다.

             그에 따라 무상 선사의 법계도 조금의 차이가 나지만, 종밀의 『원각경대소





             12) 앞의 책, “長史章仇兼瓊來禮謁之屬明皇違難入蜀, 迎相入內殿供禮之.”
             13)  앞의 책(大正藏50, 832c), “時成都縣令楊翌, 疑其妖惑, 乃帖追至, 命徒二十餘人曳之. 徒近相身一皆戰慄
                心神俱失, 頃之大風卒起沙石飛颺直入廳事, 飄簾卷幕. 楊翌叩頭拜伏踹而不敢語, 懺畢風止. 奉送舊
                所. 由是遂勸檀越造淨衆  大慈  菩提  寧國等寺. 外邑蘭若鐘塔不可悉數.”
             14)  『歷代法寶記』(大正藏51, 185a) “後章仇大夫請開禪法, 居淨泉寺, 化道衆生, 經二十餘年.”
             15)  [宋]贊寧撰, 『宋高僧傳』(大正藏50, 832c), 『神僧傳』(大正藏50, 999b), “以至德元年建午月十九日無疾示滅. 春秋
                七十七.”
             16)  『歷代法寶記』(大正藏51, 185a), “後至寶應元年五月十五日, 忽憶白崖山無住禪師. …… 使工人薰璿將吾信
                衣及餘衣一十七事, 密送與無住禪師. …… 大師時年七十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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