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3 - 고경 - 2021년 9월호 Vol.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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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중앙학림에 입학하여 1919년에 졸
업했다.
1919년 3·1운동 때는 중앙학림의 학
생들도 만세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
다. 당시 중앙학림의 강사였던 한용운
은 백성욱, 김법린 등 학생들을 불러 참
여를 권유했고 많은 이들이 서울과 지
방에서 조직적 활동을 펼쳤다.
이때 백성욱도 청년 지식인으로 민족
사진 1. 백성욱.
의식에 눈을 떴을 것이다. 그는 얼마 후
인 5월에 중국으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에서 1년여를
머물렀다. 중국에서의 구체적 활동 내용은 불분명하지만 급변하는 세계정
세와 근대화의 물결을 직접 보고 느꼈을 것이다. 당시 그가 쓴 글에서 중국
의 사회상과 서양에 대한 정보는 물론 문학에 대한 관심도 엿볼 수 있다.
백성욱은 중국에 있으면서 유럽 유학을 결심했는데 당시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이 권유했다는 설도 있다. 1920년 5·4운동 이후 중국에
서는 근공검학 운동이 일어나 프랑스에 노동자로 청년들을 파견해 학업을
병행하게 하였는데, 1차 때만 1,600명이나 보내졌다. 훗날 중국을 이끈 저
우언라이, 덩샤오핑 등도 이 시기에 프랑스에 가서 일하고 공부하며 공산
주의자가 되었다. 백성욱도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하여 중국에서 프랑스로
유학 갈 결정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20년 프랑스 파리 보베Beauvais의 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1921
년 2월에 프랑스 유학길을 떠난 김법린보다도 한 해 빠른 행보였다. 백성욱
은 어떤 이유인지 파리에서 독일어와 라틴어를 수학하였고 1922년 독일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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