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6 - 고경 - 2021년 9월호 Vol.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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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이곳에서는 특별한 영험이 있다고 하여 전통적 방식으로 『금강경』을
          독송했으며  뒤에  ‘금강경독송회’가  만들어졌다.  백성욱은  80대  중반인
          1981년에 입적했고 경기도 양주 대승사에 탑과 비가 세워졌다.

           잡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백성욱의 불교 개혁론과 지향점을 간단히 살

          펴본다. 그가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1920년대 후반에는 해외 유학생
          출신들이 세계 불교학계의 최신 동향을 소개하는 한편 조선불교의 개혁
          방안을 제시한 글들을 여러 지면에 실었다. 프랑스에 유학한 김법린, 일본

          에서 공부한 강유문, 김경주, 김태흡, 허영호 등이 중심인물이었다. 백성욱

          도 당시에는 거의 없던 유럽 유학생 출신으로 현대사회에 필요한 불교의
          역할과 과제에 대한 고민을 담아 1926년 6월 「현대적 불교를 건설하려면」
          이라는 글을 《불교》에 발표했다.

           백성욱은 이 글에서 도덕적 수양을 통해 사고를 공평하게 하고 자타의

          경계를 넘는 데 불교가 도움이 되며, 사회의 정신적 난제를 해결하는 방안
          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불교는 중생 구제를 실천해왔고 한국
          등 북방의 대승불교 전통에서는 사회적 책임이 매우 중요했다고 보았다.

          그렇기에 불교는 민족문화 향상에 이바지하고 승려는 선각자적 위상을 가

          져야 한다고 거듭 역설했다. 그는 승려는 역사적으로 지식계급이었고 승려
          가 무식할 때 냉대와 멸시를 당했다고 하여 승려들의 분발과 심기일전을
          촉구했다.

           나아가 당시 불교계의 폐단과 문제점을 하나하나 지적했는데, 도승, 교

          육, 포교, 재정, 비구니로 항목을 나누어 기술했다. 그는 먼저 승려를 뽑
          는 도승 시험 및 자격조건을 강화하고 이를 전담하는 기관을 설치해야 한
          다고 주장했다. 또 교육은 전통적인 전문강원 및 선방 체제를 강화하고 범

          패와 불화 등 불교예술을 계승하는 한편, 인문학, 자연과학, 의학 등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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