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ge 125 - 고경 - 2021년 9월호 Vol.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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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종교인이라고 몰아붙이며 구속하였고 얼마 후 불기소처분이 되었
             지만 일제는 수행공동체의 해체를 명했다. 이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서울로
             돌아왔고 1939년부터 대외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돈암동 자택에서 다시

             수행에 전념했다. 전시체제기의 엄혹한 현실 속에서 당시의 명망가들이 전

             시 동원을 독려하고 전쟁을 미화한 것과 차별되는 무위의 행보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은 후 백성욱은 이승만에게 정권을 양도하라
             는 연판장을 미군정에 내는 등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건국운동에 가담했

             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

             립되었고, 1950년 2월에 그는 내무부 장관에 임명되었지만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음 달에 그만두었다. 전쟁 중이었던 1951년 2월에는
             한국광업진흥주식회사의 사장이 되었는데 그는 독일에서 공부할 때 광부

             로 일한 경험이 있었다. 1952년 8월에는 무소속으로 부통령에 출마했다가

             떨어지기도 했다.
               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직후인 1953년 8월에는 동국대 총장에 취임하였
             고 1961년까지 재임하였다. 또한 1954년 5월에 동국학원 이사장을 겸임하

             는 등 교육행정가로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56년 다시 부통령직에 나섰

             지만 이번에도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이후에도 4.19나 5.16 등 극심한 정
             치적 부침 속에서 대광유지 사장, 광업진흥주식회사 사장, 경기학원 이사
             장, 고려대장경보존동지회 회장을 역임하는 등 활발한 사회 활동을 했다.

               한편 그는 동국대에서 『화엄경』, 『금강삼매경론』, 『선문염송』 등 선과 교

             의 주요 텍스트를 대상으로 대학원 강의를 진행하는 등 정치인과 행정가,
             사업가와 교육자를 오가며 말 그대로 올라운드 플레이어의 면모를 보였다.
             1961년 동국대 총장을 퇴임하고 나서는 부천 소사에 일종의 수행공동체인

             ‘백성목장’을 설립하여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공부하는 주경야독을 실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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